(1) 모악산 마실길
(1) 모악산 마실길
  • 하대성
  • 승인 2009.10.2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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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뫼 산자락, 사드락 사드락, 길은 나를 안아주네
높이 793m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 모악산이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하다. 예부터 엄뫼,큰뫼로 불려왔다. 김제와 완주,전주의 경계를 이루며 호남평야를 보듬고 있는 평지돌출 산이다. 산 정상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쉰길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모습 같아서 모악산으로 이름이 지었졌다고 한다. 미륵사상을 전파한 진표율사, 조선의 혁명가 정여립,그리고 한말의 종교사상가 강일순 등이 활동했던 모악산. 계룡산과 함께 한국 민중신앙의 텃밭이다. 모악산 마실길 56km 구간의 제 1코스로 잡은 귀신사에서 탑선마을까지 30여km를 따라 걷는다.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자연스럽게 그늘을 드리운 마당에 들어서면 귀신사 대적광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귀신사는 계절마다 수없이 많은 꽃들이 피고 진다. 왕관이 부럽지 않게 대웅보전 앞을 수놓은 꽃잔디도 아름답지만, 자목련, 겹수선화, 라일락, 모란꽃, 영산홍, 그리고 철쭉, 백매화, 홍매화, 딸기꽃 들이 서로 어우러져 잠시 넋을 잃는다. 뒤이어 나리꽃, 수국, 장미가 또 피어나리라. 계절마다 이름도 모를 꽃들이 저희끼리 피었다가 지는 절, 귀신사.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숨가쁜 일상에서 쉬고 싶을 때 불현듯 가고 싶은 곳이 이곳이다. 창건 당시에는 국신사(國信寺)라 불렸다. 고려 때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구순사(拘脣寺)로 바뀌었다가, 조선 고종 10년에 고쳐 지면서 귀신사로 또 개칭됐다. 몇 년 전에는 발음이 ‘귀신’과 같다고 하여 국신사로 바꾸었다가 근래 다시 귀신사로 되돌아왔다.

“돌아올 귀(歸) 믿을 신(信) ‘돌아와 믿는다’는 뜻을 지닌 귀신사를 두고 전주출신 소설가 양귀자(1992년 이상문학상 수상)는 영원을 돌아다닌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고 그의 소설 <숨은 꽃>에서 표현했다.” 문화사학자인 동행자 신정일씨가 얘기다. 한 번 찾은 사람은 그 은근한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게 되는 마력을 지녔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전주 일원을 관장하는 화엄사찰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어디에서고 금산사를 말사로 거느렸으리라고 생각되는 흔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절에는 내 마음의 자유, 내 마음의 평화, 내 마음의 사랑이 있다. 귀신사에서 중인리 이르는 길, 그 길을 걷는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지 않은가.” 거리의 시인으로, 때론 신삿갓으로 불리워지는 신정일 마실꾼의 시 한 수다.

귀신사에서 1㎞ 쯤 전주 쪽으로 가다 보면 유각마을(유씨 제각이 있는 마을)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 1.5㎞를 더 가면 김제 전주 경계지역이다. 여기서부터는 차도로 걸어야 한다. 옛길은 있으나 정비가 안 돼있다. 2m가 넘는 잡목과 칡넝쿨이 등 얽히고 설켜있다. 통과가 어렵다. 차도로 1.4㎞ 정도 가서 하천으로 내려가면 하천길이 나온다. 걷을 만하다. 구덕마을 입구에서 하천을 건너 상승마을로 연결되는 산길이다. 맞은 편 복숭아 밭 끝쪽에서 올라야 한다.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붉나무다. 가을 산을 가장 먼저 빨갛게 물들이는 나무다. 불타는 것처럼 붉다 하여 붉나무라고 부른다. 열매의 흰 가루가 맛이 짜 소금 나무라고도 부른다. 선조들은 소금이 떨어지면 붉나무 열매의 흰 가루를 모아 소금 대신 썼다.” 전북생명의 숲 운영위원이자 전주시니어클럽 문화·숲해설사인 동행자 유종권씨의 말이다. “잎의 벌레집을 ‘오배자’하며 이질이나 설사 치료에 쓴다. 잎은 제독작용이 있어 뱀에 물린 데 붙이고 천연 염색과 잉크원료로도 사용한다. 새빨간 단풍이 아름다워서 영국, 프랑스에서는 정원수나 가로수로도 널리 심는다.”며 그는 숲길을 지나며 쉼없이 설명했다. 묘지길을 지나 폐가를 끼고 좌회전, 세영농장이 나온다. 쭉 조금 더 직진하면 상승마을 모정이다. 소나무숲과 과수원을 지나면 전통 관정에 이른다. 우물처럼 돌을 차곡차곡 쌓아있다. “60년대 초 대한발 때 농경수로 쓰려고 축조한 것 같다. 이 같은 우물형태의 관정은 전에는 가끔 봤으며 지금은 아주 보기 어렵다. 귀해 보전가치가 충분한 것 같다.” 전주문화원 한상영 연구위원의 말이다.

논길을 타고 연꽃 방죽을 따라서 1km를 가면 단군상이 들어온다. 제실을 끼고 돌아나오면 중인동 주차장이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30m정도 가면 청하서원(淸河書院)이 나온다. 중인동 1287번지, 조선시대 서원이다. 문원공(文元公) 사계 김장생 (沙溪 金長生1548~1631)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구포 박강립(構圃 朴康立)과 그의 동생 청류당 박동현(聽流堂 朴東顯), 지곡 유조(芝谷 柳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고종5년(1868)에 훼철 되었다가 1905년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최근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최근에 새로 단장하였다.

중인동 하천 노송군락지를 지나 오른쪽에 체련공원이 있다. 콘크리트길을 따라 500m가면 조망점이다. 전주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사진잡기 좋다. 모정에 앉아 쉼을 취한다. 체련공원 자전거길을 따라 내려오면 인공암벽장으로 통한다. 과수원길로 가면 학전마을. 학전야생화농원이다. 이곳에서 논사이로 난 길로 원당거쳐 1km쯤 논길을 돌아 가면 추동마을이다. 마을입구 모정 아래에서 일하는 김정희(64)씨를 만났다. “87세 모친을 모시고 아내와 살고 있다. 감농사와 고추농사를 짓는다. 전에는 추동엔 100여 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먹고 살기 위해 도시로 많이 떠났다. 지금 이 모정도 3번이나 옮겼다. 자기 땅에 있으면 안 된다고 우기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모정 자재는 초창기 것이다. 꽤 오래된 것이다.” 마을의 자랑거리를 묻자 김씨는 김재중 소목장을 앞세웠다. “2000년에 도무형문화재 소목장으로 지정된 김옹은 창틀 만드는 분으로 바로 앞집에 산다”고 했다.

추동마을 입구로 빠져나가면 바로 한증막이다. 오른쪽을 보면 간대봉이 보인다. “삼국시대 쌓은 원당리 산성(院堂里 山城)보고 갑시다.”원종권 해설사의 목소리다. 코스에서 오른쪽으로 30m정도 떨어져 있다.간대봉(109m)의 능선을 감은 테머리 석성이다. 건물지로 보이는 초석이 남아 있고 산성의 동남편에서 문지(門址)가 확인 되었다. 둘레는 595.5m이며 성안에서 토기와 철기 등 백제 시대(5세기말 경)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두방마을까지는 밋밋한 1km 길이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다리로,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걷기예찬>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의 일부다. 그렇다. 우리는 모악산에 안겨 살았다. 결혼하고 자식낳고도 주름진 어머니의 품을 잊지못해 파고드는 것처럼. 항상 보듬아 주기를 원했다.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하얀 머리카락를 한움큼씩 빠지는 어머니,이젠 안아주자. 내몸으로,내발로 포근하게……

모악산 마실길은 사람이자 소통이다. 길의 역사가 곧 인간의 역사다. 태초에 두발로 걸어 다니며 사냥하고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었다. 그리고 나눴다. 가족과 친척 그리고 자연과 공유했다. 무수한 길들이 사람과 사람,세상과 세상을 이어줬다. 자연과의 일체감도 걷기의 매력이다. 자연 속으로 걷도 싶어 한다. 큰 숨으로 호흡하고 싶어 하고, 나무와 숲과 산을 보고 싶어 한다. 걷기를 통해서 현대화와 문명이 갈라놓은 자연과의 재결합을 이루려 한다. 그래서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다.

두방마을에 다왔다. 1500여년 전에 조성된 전통마을이다. 마을 형국이 말(斗) 형태의 산(山)자 형으로 동쪽이 비어 있다. 그래서 마을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고 밖으로 부터의 재해 및 재앙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마을 입구인 동쪽의 빈 공간에 숲을 만들었다. 마을 보호용 숲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나무들은 어떤 사연인지 모르지만 거의 사라져 버리고 그 흔적인 몇 그루 소나무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마을 입구 오른 쪽에 느티나무, 팽나무 등 평균 수령 150년 정도 되는 100여 그루 나무가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생명의 숲’이 선정한 아름다운 숲에 선정되기도 한 전통마을 숲이다. 이 마을 앞 남쪽으로 난 길가엔 효자 유득용의 정려인 ‘유공득용지려’가 있다. 정유재란 때 전주성이 함락될 위기가 닥쳤다. 아버지 인영은 80세로 거동이 불편하니 식구들에게 먼저 달아나도록 했다. 허나 아들은 그럴수 없어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왜적이 들이닥쳐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자 아들 득용이 아버지를 가로 막았으나 잔인무도한 왜적은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대드는 득용을 부리치고 칼을 휘둘렀고 부자는 서로 껴 안은채 숨을 거두고 만다. 여러 날 뒤 왜적이 물러가자 피난 갔던 식구들이 돌아와 보니 아버지 인영과 아들 득용의 시신은 짐승도 건드리지 않고 온전히 있는 것을 본 인근 사람들이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탄복 하였다한다. 그후 기해년에 전주 남북 밖에 정려를 세웠다가 그후 이곳 두방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두방마을 소나무 얘기가 나오자 유종권 마실꾼이 나무이야기를 한가닥 풀었다. “청미래덩굴은 우리나라 산야에 흔히 자라는 덩굴성 떨기나무로 줄기에는 가시와 덩굴손이 있다. 가지만 앙상한 외로운 겨울 숲에서 만나는 빨간 열매는 유난히도 붉은 색이다. 빨갛게 익은 열매가 아름다워 꽃꽂이 재료로도 인기가 좋다. 청미래덩굴은 명감 ,맹감, 멍개, 망개 등 지방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열매는 생긴 것에 비해 먹을 것이 없다. 토끼 똥 크기의 동글동글한 붉은 열매가 다닥다닥 달리는데 속은 비어있고 씨앗만 자리 잡고 있다. 씨앗을 감싸고 있는 약간의 보호막이 달착지근하여 먹을 것이 귀한 한겨울 산야의 배고픈 동물들에게 이 열매는 얼마나 달고 맛있는 먹이다. 부안 어느 농가에서는 봄에 여린 잎을 채취하여 통조림 가공 후 수출을 해서 농가소득을 올렸다는 얘기도 있다. 등산시 목마를때 멍개 어린잎을 앂으??그시큼함에 갈증도 해소 된다. 뿌리는 토복령이라고 하여 수은, 니켈, 카드뮴 같은 현대인이 무서워하는 중금속을 배출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옛날 중국의 어떤 사람이 부인 몰래 바람을 피우다가 매독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아내는 남편이 미워서 산에 업어다 버리고 돌아왔다. 남편은 허기가 져서 산을 헤매다 청미래덩굴을 발견하고 그 뿌리를 부지런히 캐 먹었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매독이 다 나아 버렸다. 그는 건강한 몸이 되어 마을로 내려왔다며 다시는 아내 몰래 못된 짓을 하지 않았다하여 ‘산귀래’(山歸來)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를 나누는 보니 구이중학교까지 1km를 쉽게 왔다. 상학·하학마을, 학마을이다. 학이 많이 살아 학마을로 생각했으나 주민의 얘기를 듣고 보고 아니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하학마을은 앞산의 모양이 학(鶴)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서 상학, 하학 마을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하학마을에 도착하자 오른쪽 도로 옆에 충효열행과 정려문이 있다. 명문가의 정문 규모가 특별하다.가운데는 문간을 높이 세우고 왼쪽에는 마루를,오른편은 방으로 꾸몄다.‘孝子’(효자) 문자도가 이색적이다. 정려문 앞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정려문은 대문과 함께 엮어져 있는 문이다. 정려문 안으로 들어가 봤다. 마당 귀퉁이에서 깨를 베고 있는 정금남(74)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정씨는 자신의 남편은 진즉 저 세상으로 갔고 자녀들은 전주, 서울 등 객지에서 살며 자신은 혼자 산다고 말한다. 그는 몸이 아프고 생활비가 없어 사는 게 힘들다고 한다. 아들 둘, 딸 셋 등 5남매를 두었지만 모두 객지에서 산다. 아들이 주는 몇 푼의 용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푸념한다. 한 달 생활비는 30만원이 든다고 한다. 전주에 사는 막내를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단다. 토방에는 빛바랜 전주-완주 통합 찬반 홍보용 전단 4개와 보험료 납부 통지서가 놓여 있었다.

소나무숲을 지나 도립미술관을 통해 저수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직선길 논밭을 지나니 예술인촌이 나왔다. 다시 차도를 통해 전주예술고 반대길, 다리밑으로 무지마을에 당도했다. 진양하씨 종대(宗垈)와 하정용 정려문을 찾아갔다. 구이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1.1㎞가서 우측 구이초등학교 뒷담을 타고 올라가면 나온다. 진양하씨 종대가 위치한 무지(武池)마을은 모악산을 등지고 앞에는 구이저수지가 있다. 원래는 이곳의 혈을 말할 때 무공(武公)이 단정히 않아 있으며 연꽃을 물에 드리우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종대는 각 고을의 토착성씨 중에서 직계가 맏이로 계승되면서 이어온 종가집을 의미한다. 그래서 종대는 전주의 최씨종대를 빼고는 별로 없다. 이곳에는 효열문과 정려편액이 걸려 더욱 두르러 진다. 단기 4260년에 상량 한 것으로 돼 있어 80년의 세월이 흐른 것으로 보인다. 종대의 영모재와 효열문 편액은 심농 조기석(趙沂錫)이 썼는데 원래는 김제인이나 구이 와동마을로 이사와 이 고장에 많은 필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덕진연못의 취향정 및 평촌 영명정 등을 들 수 있다.

신전마을을 지나 왜가리 서식지, 수변습지를 통해 구이저수지길을 따라 간다. 느티나무 보호수를 지나 반월마을로 진입한다. 여기서부터는 7.5km 임도, 자갈길이다. 민속한의원까지 2시간30분 거리다. 한시간쯤 가면 조망점이 나온다. 구이 저수지,오봉산, 임실 섬진댐 일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1시간 정도 걸으면 민속한의원을 거쳐 장파마을에 이른다. 장파리는 모악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계곡과 청정수련원을 지나면 나온다. 마을 뒤쪽에는 전의이씨 제실이 있다. 바로 옆에는 동국대에서 발굴한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고 여기저기 사기 파편과 흔적이 널려 있다. 장파마을 뒷산에는 선조 때 전주를 수호한 충경공 이정난 장군의 신도비와 묘소가 있다. 묘소는 지네명당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답사를 하고 참배를 한다. 지금은 전주 남고산성 올라가는 길목의 충경사에 배향되어 있다. 장파사는 장파마을 위쪽에 있는데 이곳 마을 이름을 따서 절명을 지었고, 지금은 폐찰되어 흔적만 남아있어 아쉽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이곳에서 화엄경 같은 목판 불경을 많이 찍어냈었다.

장파에서 물길을 따라 3km정도 올라가면 탑이 있어서 붙여진 탑선마을이 나온다. 여기서는 금산사 청룡사를 가기위해서는 도보로 배재골을 넘어야 하는데, 능선 못 미쳐 옛 배재성당의 전신인 터를 발견할 수 있다. 길을 걷는 일은 과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서 배운 지혜를 바탕으로 미래를 여는 일이다. 30여km걷기 내내 물과 새소리 그리고 바람소리가 벗이 되고 마실꾼이 되어 주었다.

글·사진=하대성기자 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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