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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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보원
  • 승인 2009.10.2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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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이 올해 6월 26일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됐다. 대한민국에서는 9번째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게 됐다.이에따라 조선 왕릉은 국민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국제 관광객의 발길도 늘어 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본보는 선문대 최낙기 교수의 기고로 왕릉 풍수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편집자주>

<1>건원릉(健元陵)

건원릉(健元陵)은 태조 이성계의 무덤으로 동구릉에 있는 9기의 왕릉 중에서 제일 먼저 조성되었다.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여 1394년 10월 25일 한양(漢陽)으로 천도를 하였으나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소생의 아들들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 강씨 (神德王后 姜氏) 소생의 방번(芳蕃)과 당시 왕세자였던 방석(芳碩), 핵심 참모였던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을 잃었다. 태조는 1398년 9월 5일 강씨 소생의 차남 방과(芳果)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재위기간 6년 1개월 남짓이다. 이후 방과(正宗)는 송경으로 환도를 하였으나 왕위를 5남인 방원(芳遠)에게 승계하였고, 방원(太宗)은 1405년 10월 8일 한양으로 다시 천도를 하였다. 태종 재위시인 1408년 5월 24일 새벽 태조는 천식이 심하여 태종이 청심원(淸心元)을 드렸으나 삼키지 못하고 태종을 두 번 쳐다본 다음에 승하하였다.

태조는 재위 시 목사동(木寺洞), 과주(果州), 광주(廣州), 안암동(安菴洞) 등에서 수릉(壽陵)의 자리를 살폈으나 정하지 못하고 승하하자 태종은 하윤(河崙)을 총호사로 유한우(劉旱雨)·이양달(李陽達)·이양(李良)을 상지관(相地官)으로 삼아 산릉(山陵) 자리를 고르도록 하였다. 하윤은 상지관이 추천한 원평(原平)의 봉성(蓬城) 땅을 둘러보고 쓸 수 없다고 하여 해풍(海豊)의 행주(幸州)의 땅을 태종에게 추천하나 다른 곳을 고르도록 지시 받는다.

양주(楊洲) 지역에서 능지를 다시 찾던 중 검암(儉巖)에 사는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검암산(儉巖山) 아래에 자리를 정하였다.

그 해 7월 그믐날부터 충청도 3,500명, 풍해도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의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산릉의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을 때 서운관(書雲觀)에서 상서(上書)하기를 “벽돌로 능실을 만들 때 밑바닥은 벽돌을 쓰지 않는 이유는 지기(地氣)를 통하게 하고 물기는 새어 나가게 하며, 관(棺)을 달아서 내리도록하면 땅을 넓게 깨뜨리지 않아서 기운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고, 석회(石灰)는 나무뿌리를 막고 물과 개미를 방지한다.”며 벽돌과 석회를 사용하는 능실도 석실과 같은 역할이니 태조의 능실을 석실(石室)로 조성하기를 청하여 건원릉은 석실로 조성되게 되었다.

9월 9일 자시(子時)에 상왕인 정종과 태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조를 계좌정향(癸坐丁向, 1시 방향에서 13시 방향을 바라보는 방위)으로 조성된 현궁(玄宮)에 장사(葬事) 지냈다.

당시 국상에 참여한 명나라 사신 기보(祁保)는 회암사(檜巖寺)로부터 오다가 건원릉 터를 살펴보고 “어찌 이와 같은 천작(天作)의 땅이 있는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일 것이다.”라고 감탄을 할 정도로 건원릉은 명당으로 취급 받는다.

또한 총호사로 활동한 하윤이 이곳을 건원릉 터로 적합함을 태종에게 고하게 된 것은 자신이 1393년(태조 2) 12월 11일 계룡산 도읍지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한 상소문의 토대가 되었던 송(宋)나라의 호순신(胡舜申)이 쓴 ‘지리신법’이라는 풍수 이론으로 좋은 터임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건원릉은 계좌정향(癸坐丁向)에 병파(丙破, 11시 방향으로 물이 흘러나감)로 호순신 이론에 대입하면 사국(四局)은 토국(土局)에 해당하며, 구성(九星)으로는 녹존(祿存)에 해당되고, 녹존 중에서도 파구(破口)가 갑경병임(甲庚丙壬)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면 최고의 길지라는 이론에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호순신의 ‘지리신법’은 하윤의 상소문에 언급된 이후로 조선시대 지리학(地理學) 4대 고시과목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유일한 이기론풍수서가 되었다.

건원릉의 봉분은 잔디가 아닌 억새로 덥혀 있는 데 이것은 자신이 죽으면 고향인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어기고 건원릉에 장사를 지낸 태종의 작은 배려로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조성하였기 때문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태조는 실제로는 자신이 사랑했던 신덕왕후 강씨 무덤인 정릉(貞陵)에 묻히기를 원했었지만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동구릉에 잠들게 되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최낙기 교수 프로필

- 최 낙 기(崔洛畿)(51)

-선문대 풍수지리 담당교수(2004년∼현재)

-다수 방송출연

-저서: 풍수지리를 올바로 알면 부자가 될 수 있다(2007·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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