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125)
유산(125)
  • 이수경
  • 승인 2009.02.2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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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두보다 먼저 배에 끌려 온 선원들은 모두 눈에 초점을 잃고 있었다. 한결같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놈들은 마약을 쓰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대두가 승선한 배는 새우 배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멍텅구리는 위장이었던 것이다. 새우조업은 눈가림이고 또 다른 목적이 있는 배였다.

밀수선. 공해상에 정거장처럼 고정시켜놓고 중국 쪽에서 들여오는 밀수물건을 받아서 국내로 들여보내는 범죄 단의 배였다. 아니 밀수조차 눈가림이었다. 사실은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사람의 장기를 팔고 사는 인신매매를 주업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해적선은 낭만이나 있었다. 놈들은 인간을 개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악귀들이었다. 목돈을 만들게 해준다고 속여서 선원으로 끌고 온다. 모집요강의 제 일조가 연고가 없는 사람이다. 감쪽같이 살아져도 실종 신고를 하지 않을 사람을 찾는 것이다. 주로 노숙자나 빚쟁이로 쫓겨다니는 사람들이다. 감언 이설에 속아 일단 승선하면 끝장이다. 다시는 세상구경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선원으로 부려먹다가 쇠약해져 쓸모가 없어지면 장기를 뽑기 위해서 죽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사람의 배를 가른다. 인신매매로 사람을 통 체로 넘겨주기도 하지만 해적선 위에서 수술도 했다. 신장을 떼어 내기도 하고 간을 뽑기도 하는 것이다.

어자피 죽는 것이라면 탈출을 해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놈들의 말대로 탈출은 곧 죽음이었다. 쇠고랑을 풀기 전에는 망망대해로 뛰어 들 수조차 없었고 설령 뛰어 들었다 해도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단 일 프로도 없었다. 더 두려운 것은 어설피 탈출을 시도했다가 놈들에게 걸리면 그 날밤으로 수장이 되든 아니면 마취도 없이 배가 갈리어 장기매매 단에 던져지고 말 것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어쩔 수 없었다. 놈들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해야 하는 것이다. 반항을 해 보았자 역부족이다. 놈들에게 문제를 일으키면 탈출은커녕 죽음만 빨리 찾아 올 뿐인 것이다. 처음에는 모질게 대 하던 놈들도 대두가 생각지 않게 고분고분 하자 손이 모자란 탓인지 작은 심부름을 시켰다. 밥도 시키고 배 갑판도 닦으라고도 하고 밀수선이 올 때 짐을 나르게도 했다.

힘이 들었다. 하지만 놈들의 동태도 알 수도 있었고 어두운 배 밑바닥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나은 셈이 되었다. 덕분에 눈으로 보지 못할 것도 보게 되었다. 물론 고된 만큼의 대가도 있었다. 제 놈들이 먹다 남은 빵 쪼가리도 던져주었고 어느 날 밤인가는 소주도 한잔 얻어먹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포자기가 되어가면서 놈들에게 동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조차 없다. 처음 끌려왔을 때는 밤 낯을 셀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날짜는커녕 밤 낯이 지나는 것조차 구분 할 수도 없다. 온통 파란 하늘과 파도 속에서 하루 하루가 같은 생활이고 보면 이제 지난 세월은 그때가 언제였던가 싶게 기억조차 가물거려지고 마는 것이다.

별이 무수히 뜬 밤이었다. 갑판으로 끌려왔다. 밤중에 끌려나온 적이 많다. 보급선이 들어오는 날이나 밀수선이 들어오는 날이다. 짐꾼이 필요해서다. 기억이 맞는다면 이렇게 한밤중에 끌려나오는 것은 밀수선이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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