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秋(만추)
晩秋(만추)
  • 김경섭
  • 승인 2008.11.04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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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만추라는 한국영화가 있었다.

사흘간의 특별휴가를 얻은 모범수여인이 깊은 가을 속으로 기차여행을 하면서 경찰에 쫓기는 청년을 만나게 되면서 사흘간의 시한부 사랑, 둘은 그녀가 형기를 마치게 되는 날 다시 만나기를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비로소 그날 바바리 코드 깃을 올리고 낙엽이 스산한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우수에 젖은 여인…,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어렸을 적에 보았던 우수와 정열이 공존하는 여인, 지적이면서도 강렬한 눈빛의 주연배우 문정숙과 오버랲 되어 화면 가득히 깊어 뒤척이던 늦가을 장면 기억이 선연하다.

그런 가을이 또 깊어간다.

한해의 끄트머리로 세월은 재촉한다.

지난여름 촛불의 뜨거운 열기도. 금융공황의 긴 그림자도. 생활고에 갈수록 찌든 서민들의 한숨도 개의치 않고 무심한 세월은 질주하는 천리마 갈기를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너무 빠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우수에 젖은 여인처럼 이 가을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더 춥기 전에 어떤 희망을 기다리는 걸까 금년 내내 절망과 실패의 연속 속에 남은 두어 달 따끈한 웃음을 행복을 단 몇 근이 라도 얻어 보고 싶은 것일까.

영화처럼 가을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주인공들처럼 쓸쓸하다.

장롱 속에 나후타린 냄새가 물씬 나는 두터운 옷을 꺼내면서 그저 올 한해도 몸 성히 보내는 구나 정도의 자위로 만족 하다보니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편지 한 장 쓰고 싶을 정도의 여유도 사치일까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헤어진 시월의 마지막 밤도 없었고 금빛 은행잎 눈부신 낙하 군무도 느낄 새도 없었으니 말이다.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게 더큰 슬픔을 얹어 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찮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 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 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황폐하게 해서 더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고 바스라 지며 이루어지는 멸망과 죽음들이 왜, 이 가을의 축복이고 아름다움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시인 장식주가 탄식한 ‘가을의 시’다.

그렇다. 또 금새 찬비와 함께 진눈깨비가 몰려와 허둥대기 전 한번쯤 늦은 밤 주막도 좋고 아내와 새끼들이 모두 잠든 거실도 좋고 화사한 색깔도 지쳐가는 등산길도 좋고 바바리 깃을 세우고 여수 가는 밤 열차 속도 좋다.

지난여름 욕심과 불평과 미움을 조용히 고백하고 그래도 이 가을이 왜 축복이고 왜 아름다움인지 겸손히 깨달아 보자 하여 어쩜 영영 만나지 모를 남자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만추의 여인처럼 아직은 절망적으로 쓸쓸하지는 말자.

박철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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