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서예가 권영수, 한국화가 영주 자매
33. 서예가 권영수, 한국화가 영주 자매
  • 김효정
  • 승인 2008.10.19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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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끝에 먹을 묻히고 곧게 그어 가는 획마다 우리 것의 기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작가 정신이 살아 꿈틀거린다.

서예가 유산(裕山) 권영수(59)씨와 한국화가 안산(安山) 권영주(48)씨 자매. 두 사람은 자매이자 예술적 동지이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서예를 근간에 둔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세대를 이해하며 많은 도움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그들에겐 최고의 스승이었던 아버지 고(故) 여산 권갑석 선생이 여전히 함께 한다. 올 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여산 선생. 그러나 자신의 뒤를 이어 가는 든든한 두 딸을 세상에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두 딸은 아버지 밑에서 붓을 잡았다. 그리고 지금, 한 명은 서예가로 또 한 명은 한국화가로 자신들의 입지를 굳게 세운 두 사람.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능통했던 아버지의 재능을 두 딸이 골고루 나눠 받은 셈이다. 큰 딸인 영수씨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 곁에서 먹을 갈며 인고의 여정을 걷는 서예가의 모습을 직접 보며 자랐다.

“아버지 옆에서 먹도 갈고, 종이도 붙이고 그렇게 아버지가 글 쓰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어요. 그래서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일찍 알았다고 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6남매 중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올곧게 서예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영수씨다. 서예가의 딸로서 ‘아버지 것’을 물려 받았으니 당연한 순리라는 것이 영수씨의 생각이다. 30대 중반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한 그는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초대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큰 딸이다 보니 더 책임감을 느꼈을 수 있지만, 아버지 가시는 길을 뒤따르는 것이 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대를 이어 붓을 잡으니 아버지도 좋아하셨고요.”

그리고 그는 한글 서예를 중점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리 한글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알기에 선택한 길이다. 우리글을 제대로 알고 세계에 알리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도 담겨 있다.

서울을 오가며 정안당 신정희 선생에게 궁체를 익힌 그의 글씨는 그러나 궁체에 머물지 않고 획마다 각 서체가 근간을 이루는 그만의 정갈하면서도 힘있는 한글체를 보여 주고 있다. 이같은 한글에 대한 열정으로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한글 서우회는 올해 11월 일본 동경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우리 한글을 선보이는 전시도 마련한다.

“아버지는 ‘우리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시며 한글을 널리 알리길 바라셨어요. 지난해 전주에서 일본과 교류전을 처음으로 열었는데 앞으로도 꾸준히 이러한 작업들을 진행해 나갈 생각입니다.”

아버지에게 서예의 기본을 배운 것은 막내 영주씨도 마찬가지. 그러나 대학입학 당시 서예학과가 없어 선택한 한국화는 이제 그의 업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의 근간이 되는 것도 역시 글씨다. 여산 선생이 유난히 귀히 여겼다는 막내딸 영주씨는 아버지 생각에 눈가가 촉촉해진다.

“먹을 다루고 선을 긋고, 화제를 쓰는 것은 글씨와 그림이 별반 다르지 않아요. 한국화를 그리기 위해서 서예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 것이죠. 아버지께 배운 서예는 제 작품세계의 기본이 되었어요. 그리고 항상 그림을 그리면 제일 먼저 아버지께 보여 드리는 것이 필수 코스였는데 그 때마다 많은 조언을 해주셨어요. 많이 예뻐해 주셨었는데..”

이처럼 자신을 꼭 닮은 두 딸에 대한 여산 선생의 각별함은 아호에서도 드러난다. 여산 선생은 온 가족에게 호를 지어줬는데 유독 영수,영주 두 딸에게만 자신과 같은 ‘山’자 돌림으로 호를 지어줬다. 그리고 지난해, 아버지 여산 선생이 그토록 원했던 가족 서화전을 ‘삼산(三山) 가족서화전’이란 이름으로 열었다. 아버지와 언니의 글씨에 막내 영주씨가 그림을 그렸고 두 딸과 함께 한 그 시간들을 무척 행복해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자리가 아버지와 두 딸이 함께 한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서울에서도 한번 더 하자고 하셨는데, 끝내 그 소원은 이루지 못하고 가셨어요. 사실 아버지와 같은 대가와 함께 전시를 한다는 것이 자식이지만 무척 부담스럽고 어려웠거든요. 이럴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할 것을 후회가 됩니다.”

이제 아버지의 그늘을 떠나 두 딸은 세상에 홀연히 섰다. 아직은 낯설고 두렵다. 한국 서단의 거목이었던 아버지의 존재가 그만큼 컸던 까닭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빈 자리를 하나 둘씩 매꿔 나가려면 이제 더욱 갈 길이 멀고 바빠졌다.

큰 딸 영수씨는 한글서우회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서예연구회를 맡았다. 실력있는 신인을 발굴하고 우리 서예를 알리기 위한 교류 사업에도 힘을 쏟았던 여산 선생의 뒤를 이어 그 업적에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발로 뛸 생각이다.

“매사에 공정하고 투명하게 일을 진행해 나가셨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하나씩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어요. 투병 중에도 서예 발전을 위해 고민하셨던 그 마음을 헤아려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 나갈 생각입니다.”

또 아버지의 작품을 정리하고 한 자리에 모아 회고전을 열고 책 출간도 계획 중이다. 올 봄 13년만에 전주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영주씨도 작가로서 작업에 매진하면서 언니를 도와 아버지 추모 사업에도 열중할 생각이다.

자매의 첫 스승이자 마지막까지 최고의 스승이었던 아버지. 너른 품으로 항상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아버지의 부재는 여전히 목울대를 아프게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단단한 묵향으로 다른이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기 위해 세상에 나선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김효정기자 cherry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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