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거부하는 익산
책을 거부하는 익산
  • 김한진
  • 승인 2008.07.1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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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병기 선생은 여산면에서 나고 자란 시조시인이며 국문학자로서 익산을 빛낸 인물이다. 가람은 시조의 이론을 정립하고 창작하였으며, 고전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중록’, ‘인현왕후전’, ‘의유당일기’, ‘요로원야화기’, ‘어우야담’, ‘역대시조선’ 등 우리가 익히 들어온 고전을 발굴하여 국문학사를 정립하였다.

그런데 애석한 것은 가람 선생이 소장하던 수천 권 문화재급 장서가 당신이 나고 자라던 익산도 아니고, 재직하던 전북대도 아닌 서울대학교로 옮겨져 가람문고란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버금갈 만큼 소중한 자료를 소장하던 전 원광대 유재영 교수의 장서도 원광대가 아닌 전남대로 갔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그분의 아드님께 들었다. 당신의 이름으로 문고를 마련한다면 책을 기증하겠다고 했는데 원광대에서 이를 거절하여 부득이 전남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벌써 한두 해 전에 있었던 일이라는데 무심한 탓으로 이제야 소식을 접하였다.

유 교수는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파한집’, ‘보한집’, ‘백운소설’, ‘여범’ 등 많은 고전을 번역하였으며, 수많은 고문서와 개인 문집을 소장하였다. 유 교수의 장서는 내가 가까이서 보아왔고 댁을 찾아서 한문을 배웠기에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다니던 모습이 훤하다.

이런 소식을 접하고 나니 몇 해 전에 글쓴이가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언젠가 글쓴이가 편집한 몇 권의 책(익산에서 발간한 문예지, 향토지 등)을 들고 익산 시립도서관을 찾았다가 문전박대당한 적이 있다. 도서관에 책이 많으면 보관할 데가 부족하니 책을 기증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익산 시립도서관이 몇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지 글쓴이는 아는 바 없다. 만일 서고가 부족하면 열람실을 없애면 된다. 도서관은 책을 소장했다가 빌려주는 곳이지 제 책을 가지고 와서 읽거나 시험 공부하는 독서실이 아니다.

또 도서관이 비좁으면 증축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지 책 몇 권 가져다 두고 자리만 보전하려는 태도는 잘못되었다. 책을 거부하는 도서관은 도서관이 아니다.

이런 수모를 겪고 돌아서면서 내 다시는 익산 시립도서관에 책을 기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뒤로도 내가 짓거나 편집한 책은 전국의 대학도서관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 수백 권씩 발송해도 유독 익산 시립도서관만은 한 권도 보내지 않는다.

글쓴이도 책 욕심이 많아 책 사는데 아파트 한 채 값은 썼다. 국어학, 국문학, 종교, 역사, 향토사 등 좋은 책이면 인연 닿는 대로 사 두었다. 언젠가 한국학을 전공한 몇 사람이 죽을 때쯤 원광대에 책을 기증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유재영 교수의 소식을 듣고서 내 짝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 익산 시립도서관도 원광대도 아니라면 어디에다가 책을 기증할 것인가 들지 말아야 할 화두를 하나 들었다.

익산은 ‘고도 보존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고도로 지정받은 도시이다. 최근에는 문화재단을 만들어 문화 도시로써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열매를 맺어 고도로써 문화 도시로써 새롭게 태어나려면 그에 걸맞은 시민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익산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때 의구심이 든다.

책이 살지 못하는 익산, 사람도 살지 못하게 될까 무섭다.



이택회(수필가, 전 익산교원향토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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