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내음 나던 변산의 길은 구불구불 갈치 ‘꼬랑지’를 닮았다. 완주 경천은 여태 물길을 따라 출렁이듯 하다. 길이 땅을 따라 몸을 내어 주는 것은 물이 ‘물길’에 자신을 내맡기는 이치다. 길은 그만큼 유약하고 유연하다.
그 길의 주인은 오래도록 ‘사람’이다.
마소 대가리가 앞섰어도 역시 그들의 주인은 사람이기에 길의 주인도 사람인 때문이다.
버스에서 만나 결혼한 사람이 잘산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다. 그러나 어쩌면 길에서 만나 살 비비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더 아름다울 것 같다. 더군다나 같은 쪽을 걸으며, 같은 질감의 땅을 밟으며 나눈 이야기가 사랑이 되고 삶이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어 갈까.
이탈리아 영화 ‘길’도 안소니 퀸과 줄리에타 마시나의 이질적 삶을, 길을 무대로 영상에 담았다. 떠돌이 생활도, 싸움도, 사랑도 길이 있기 때문이다.
달음박질치던 흙길은 이제 여지없이 시커먼, 그래서 여름이면 열풍을 품어 올리는 아스팔트 길로 변했다.
주인도 바뀐 듯 아스팔트 길엔 사람대신 온통 자동차 뿐이다.
사람은 그 아래나 옆으로 비켜섰다. 그래서 옛날이 좋았다고 하는 모양이다. 임실 옥정호 길이나 진안 운일암반일암 길을 부러 찾아야 보부상 드나들던 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지금의 길은 쾌속의 길. 막다른 길이 보일 정도로 뚫려 있어야 시원하게 밟을 수 있다. 시속 50㎞, 80㎞로 붙들리지만 않는다면 ‘아우토반 적’ 질주가 꿈이 되고 정의가 되는 세상이다.
‘길’은 다시 세상이 디자인한 이치에 제 몸을 맡기고 있다.
글 소인섭기자 i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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