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밑도 끝도 없는 소품 요구­
70. 밑도 끝도 없는 소품 요구­
  • 소인섭
  • 승인 2007.12.12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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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리<전주영상위 로케이션지원팀장>
정말 밑도 끝도 없이 그들이 요구하는 무언가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기 일쑤다.

새벽녘 울린 전화를 받아보니 “우리 피아노가 필요해요. 빌려주세요!” 새벽 3시 30분, 우리집에 피아노가 있다면 냅다 던져 주고 싶지만 없다. “언제 필요한데요?” “7시 촬영이에요~.” 이런… 여태 뭣하다가 종이건반 빌리는 것도 아니고 이제 말하는 건지….

처음 일을 시작 할 때쯤엔 아직 제작부 막내기질을 다 벗지 못한 터라 무조건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물론 그들도 오밤중 헛소리 탱탱해가며 말도 안 되는 걸 찾는 감독이나 또 다른 누군가의 뒷통수를 향해 펀치 한방을 날리고 싶었을 정도로 무모한 부탁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안다.

필자가 제작부 막내로 현장 온갖 심부름을 다 하고 있었을 때, 전주천에서 촬영준비하던 조명팀이 물속에 맨발로 들어갈 수 없다며 고무장화를 요구했다. 새벽 1시에 말이다. 남부시장 신발집을 다 두드리며 다니던 기억이 난다. 어렵고 운 좋게도 막걸리 한 잔 하시던 아저씨를 만나 아저씨 집에 따라 갔던 기억이 있다. 가져 갔더니 다들 물속에 맨발로 들어가 “별로 안 차갑네.” 이러고들 있다.

이런일 뿐이랴. 평면 텔레비전, 가죽소파,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요상스러운 나사 한 개, 검은 고양이, 공고용 벽보등 그 종류 한번 가지각색이다. 이것들이 이상하게 낮에는 안 필요하고 밤에만 필요한 것도 묘한 일이다.

이런 빌림을 계속하다보면 얼굴에 가죽이 10mm는 두꺼워 지는데, 이러한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

온갖 운동기구가 필요했다. 샌드백, 죽도, 글러브, 벤치 프레스, 역기, 아령 등. 하지만 아침까지 구한거라고는 무게가 짝짝이인 아령2개가 전부다. 머리를 싸맨 끝에 친구녀석과 둘이 앉아 촬영지였던 김제지역을 중심으로 체육사 전화번호를 모조리 따냈다. 쭉 훑다보니 필이 오는 상호가 하나 있다.

대뜸 전화를 걸어 “영화사 **입니다. 이래 저래해서 운동기구를 빌리고 싶습니다.”고 하니 가게로 오라신다. 크진 않았지만 없는 게 없는 가게다.

사장님 뭐가 필요하냐며 일일이 다 챙겨 주시고 없는 것은 새것도 내어주신다. 사모님은 얼마나 맛있는 생강차를 주셨는지 아직도 그 향이 코 끝에 달작지근 한것 같다. 일단 물건을 다 챙긴 후 수령증과 반납일자를 정하기 위해 앉아서 이야기를 하던 중…이상하다…뭔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이런 세상에나…사장님, 우리를 착각하신거다. 축구심판협회 간부쯤 되셨던 사장님은 당시 비슷하게 진행 중이던 축구영화 한편을 협회 차원에서 지원하고 계셨던 게고, 전화를 걸어 물건 빌려달라고 말하는 우리가 당연히 그 제작팀인 줄 아셨던 것이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다. 눈치만 살살 보구 있는데 “뭐 이 팀이나 그 팀이나. 남자가 두 말하는 거 아니니까 그냥 가지고 가서 찍으쇼!”한다. 어찌나 감사한지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감사합니다를 얼마나 외쳤던지. 빌린 운동기구를 한 아름 안고 촬영장에 들어 갈 때의 당당함이란. 와~우!

사장님 덕에 정말 잘~찍을 수 있었다. 분위기에 딱 맞게…찍는 내내 배우들이 기구를 가지고 장난 칠 때마다 잔소리를 해야 했고, 촬영 중 혹시 물건에 흠집이라도 날까봐 눈치를 바짝 세우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사장님! 그 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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