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박남수 作 '새'
92­. 박남수 作 '새'
  • 김효정
  • 승인 2007.11.2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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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공동체를 이룩하는 길
1.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박남수(1918~94)「새」전문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도로에 너부러진 생명의 흔적을 본다. 어느 자취는 아직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았고, 어느 자국은 이미 그 형해가 바람의 사촌쯤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자연이 인위적인 인간의 속도로 인하여 무참하게 짓밟힌 현장을, 또한 무심하게 지나쳐야 하는 인간의 무심이 또한 편치 못하다. 어느 경지에서 ‘필요이상’이라는 욕망의 속도를 조절해야 할까? 속도에 몸을 싣고 가면서, 저들의 자연을 외면해야 하는 비순수한 인간의 무심이 결코 편치 않다.

인간은 저들의 생명을 외면함으로써 속도의 쾌감을 얻었다고 기뻐하지만, 정작 행복하지만은 않은가 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교통사고로 1만여 명 ‘사람의 자연’이 도로에서 비명횡사한다 하지 않는가! 더구나 가관인 것인 그 중에 절반 가까운 5천여 명이 자신의 두 발로 도로를 보행하던 경우였다니! ‘필요이상’의 욕망인 속도경쟁은 야생동물의 생명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인간 자신의 생명마저 위협하고야 만다. 인간은 야생동물의 희생에 눈감은 채 인간만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정작 얻는 것은 피에 젖은 ‘불행한 행복’이었음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닭장차에 실려 가는 억압된 자연을 목격하는 심사가 편치 않다. 그렇대서 동물에게도 생명권이 있다며, 짐승 털옷을 거부하고, 짐승 가죽으로 만든 공산품 사용을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먹거리로서, 아직도 굶주림이 일상이 된 인류가 세계 도처에 널려 있는 상태에서 양질의 고단백 식품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생명 있는 저들의 말할 수 없는 ‘무언의 자연’ 가축을 말할 수 있는 ‘유언의 자연’인 인간이 배려할 수 없는, 비순수한 몰염치가 불쾌할 뿐이다. 필요이상의 사연이 개입된 생명의 훼손을 목격하는 심사가 매우 언짢다.

겨울철새들이 날아들면 이 땅의 가축업자들은 초비상이 걸린다. 우리나라만의 고민이 아니다. 겨울철새가 날아드는 세계 도처의 축산업자들은 비상상태에 돌입한다. 철새, 저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조류 독감 병원균이 가축업자들의 짐승에는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지닌 조류 인플루엔자 병원균이 왜 하필이면 가축들에게만 치명적인 위해균이 될까? 억제된 생명의 자연성이 병원균에 대한 저항력을 잃게 되었다는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필요 이상’으로 억제된 생명성이 인간의 욕망에 던지는 불길한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가축의 생명성을 외면한 채 얻은 인간의 행복이 실은 병원균에 감염된 ‘불행한 행복’이었음을 언제쯤 깨닫게 될까.

인간이 가장 자연스런 생명의 순리를 거역하고 얻고자 하는 행복이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피 묻은 행복이나, 불행한 행복은 결코 아닐 것이다. 생명 있는 모든 자연(自然)이 사연(事緣)으로 인하여 침해 받지 않는 생명 공동체를 이룩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동희<시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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