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관수 선생, 아직 음지에
백관수 선생, 아직 음지에
  • 이승철<사회부장>
  • 승인 2001.02.1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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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고창출신 근촌 백관수선생이 홀대받고 있다.
생애를 걸쳐 항일, 건국운동에 몸을 바쳐왔건만 예우책 자체가 없는 셈이다.
일제에 항거했던 작은 업적이 있는 인사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내려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국가보훈 차원에서 이름을 기리고 있으나 근촌선생만은 독립유공 테두리의 바깥에 자리하고 있다. 선생의 사후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 때문.
생전의 행적을 보며 서훈 당위성을 곱씹어볼수 있다.
82년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했던 2.8독립선언의 가장 중심에 서있었던 근촌선생.
당시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조선청년독립단장으로 강단에 선 근촌선생은 자신이 초를 잡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한민족역사에 길이 빛날 2.8독립선언을 촉발시켰다.
당시 대한독립선언은 국내와 일본에서 동시에 벌이기로 했었다. 근촌선생은 송계백을 통해 고하 송진우에게 독립선언서 내용을 전달했다. 동경에서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곳이 없기 때문에 활자만 구해 보내달라는 취지였다.
활자가 근촌선생에게 전달되긴 했으나 일경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어려워 결국 근촌선생 하숙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기타서류 1만여부를찍어내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20일뒤 조선을 뒤흔든 3.1운동을 잉태하고 이를 촉발하는 기폭제를 만든 대거사였다.
이 사건으로 근촌선생은 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윤창석 김상덕 서춘 이종근 송계백등 독립선언 서명자 8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처음으로 조직되는등 국내외 정세가 혼미를 거듭하자 민족주의자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조선사정연구회를 결성하고 공산주의가 국내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민족진영 단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2년뒤 민족단일조직으로 신간회가 출범하자 가담하고 하와이에서 열린 제2회 태평양회의에 민족대표로 참석했다.
1937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겸한 제7대 사장으로 취임한 근촌선생은 일제의 한글교육폐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의 강요에 저항하면서 끝내 폐간계에 날인하지 않아 1개월간 구금되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민족진영 색채를 띤 조선민족당(한국민주당의 모체)을 발기하고 미군정하에서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지냈고 고향인 고창에서 제헌국회의원 당선, 초대법사위원장및 헌법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헌법제정과 정부수립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역사 한가운데 자리한 선생의 행적을 개괄해볼때 독립유공 서훈누락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중론이다.
국가보훈처는 일제때 시국강연과 한국전쟁후 행적 부재를 서훈 유보로 들고있다.
한일역사연구소가 '청산하지 못한 역사편'에서 거론된 '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인'의 명단에서도 근촌선생의 이름을 찾아볼수 없다.
검증되거나 확인되지 않은 전력을 문제삼아 예우를 하지 않는다면 향후 역사의 중심에서 민족발전의 길을 외롭게 걸어가려는 인물이 나타날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상기할것은 2.8독립선언이 치밀하게 준비됐다는 점이다.
근촌등 동경유학생들은 그 전해에 망년회와 웅변대회 추진을 결의하고 자금의 확보, 국내외와 연락, 선언서 작성및 인쇄 등의 준비를 거쳐 역사를 만들어 냈다.
2.8독립선언 82주년, 새로운 세기를 맞은 지금 건국의 기초가 됐던 독립운동이나 의식도 폐기되는 것이 아니냐는 회의를 가지게 된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던 근촌. 그의 정신은 눈앞의 이익보다 정의에 눈을 돌렸고 마음은 당대보다는 후손을 향해 있었다.
과거의 행적에 연연하는 것으로 비추어질수도 있으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과거의 우국지사라는 주춧돌이 있었기 때문에 건재하게 버티고 있다는 교훈은 결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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