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107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동학농민혁명 107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 김정현기자
  • 승인 2001.06.01 1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학농민군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군의 일차적인 목표를 실현시
킨 최대의 승전이었다.

점령이후에는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안 등을 내걸고 근대적
인 개혁의 단행을 가능케 했다. 또 청일 전쟁의 계기가 돼 향후 20
세기 동북아시아 질서 개편의 기점이 됐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대의를 널리 알리고 오늘의 시대정
신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동학농민혁명 107주년 기념 학술학술대
회가 1일 오전 9시부터 5시30분까지 전주코아리베라호텔에서 동아시
아 석학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학술대회는 동학농민혁명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동학
농민군이 꿈꾼 세상, 일본제국주의와 동아시아인의 인권, 동학농민
혁명의 21세기적 계승전략 등의 주제로 펼쳐졌다. 또 정창렬 교수
(한양대)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란
주제로 기조강연이 이뤄졌다.

이날 학술대회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동아시아적 차원에
서 규명하고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이뤄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
화를 점검하고 동학농민혁명을 인접국가인 일본과 중국의 내로라 하
는 석학들이 대규모로 참가해 국내 시각이 아닌 동아시아의 시각으
로 규명하고 계승전략을 논하는 자리였다.

한편 2일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계승전략이란 주제로 펼쳐진다.
1일 열린 학술대회의 주요 주제발표를 요약해본다.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학살(제노사이드) - 이노우에 카츠오(井上
勝生. 홋카이도대학 교수)
동학농민군을 무력 진압한 군대는 일본군과 일본군의 지휘를 받았
던 조선 정부군이었다. 무력 진압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는 1894
년 10월 27일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일본군총지휘부)이 내린 동학농
민 살육(학살) 명령이었다. 이 명령의 존재를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
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일본군 작전일지로부터 최초로 발견한
연구자는 재일(在日) 연구자인 박종근씨였다.
1894년 10월 27일 오후 9시 30분 히로시마 대본영 병참(보급부대)
총감 카와카미 소로쿠로부터의 명령이 전신을 통해 인천의 일본군
병참사령부에 전달 되었다. 전신은 동학당(동학농민)에 대한 처지
는 엄렬(嚴烈)함을 요함, 향후 모조리 살육할 것 이라고 하여 살육
을 명령하고 있다.
카와카미가 말한 엄렬한 진압은 이후 잇따른 민중학살로 이어져 갔
다. 실제 사료에 따르면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
군 진압은 이사벨라 버드(비숍)여사가 평한바와 같이 정확무비한 무
라다식 라이플총을 휴대한 일본군이 죽창과 하승총 밖에 없는 조선
민중에 대한 대학살로 이어졌다. 제일의 연구가인 조경달씨는 농민
군 사상자는 3~40만명, 사망자는 5만명에 육박한다고 추측하고 있
다.
이같은 대학살에 나타난 문제점은 당시 조선에 설치돼 있던 일본
군 병참지부와 인천병창감은 어떤 권리에 의해 동학농민 참살 명령
을 내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또 히로시마 일본군 대본영은 어
떤 권리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동학농민 참살 을 명하였으며, 또
그 명령을 실행하도록 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노우에 카츠오교수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교관과 방위연구소 도서
관 소장 사료 속에는 동학농민군 진압 관계사료가 상당히 존재하고
있으며 동학농민군 진압 실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남경대학살과 일본군의 중국침략 만행에 대한 연구 - (牛大勇 북경
대학 역사학과 교수)
남경대학살의 규모는 세계적으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으며, 유태
민족에 대한 독일의 박해를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일본군은 중국
의 수도에서 6주 동안 30여만 명을 도살하였으며, 수많은 건물이 파
괴당했다. 또 10만여 명의 여성이 유린당하였으며, 창고의 재화는
깡그리 강탈당했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좀처럼 보기 드문 대 재난
이였다.

남경대학살과 유사한 일련의 일본군 만행은 일본군이 중국침략전
쟁 중에 인권 유린, 수많은 생령에 대한 학대, 중국인의 학살 등이
다반사로 행해졌음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남경대학살이 결코 고립적
이고 우연적인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일본 군국주의의 죄상에 대해서는 반드시 규명해야만 한다. 하지
만 전쟁의 우두머리와 일반민중의 관계를 정확히 구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이 어떻게 침략전쟁을 일으켰는지, 아시아 각국의 인민에게 어
떠한 구체적 피해를 입혔는지, 일본 인민에게도 어떠한 구체적 피해
를 가져왔는지, 그들에게 명쾌하게 설명해줘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