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리> 산에서 말한다 (2)
<삶의 자리> 산에서 말한다 (2)
  • 승인 2004.06.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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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그대로 비워있게 하여 자신을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라. 충만을 가득 참으로 비유하느냐. 충만은 언제나 여여이어라.”

  어둠에 쌓인 산에 잠든 새들의 편안함은 부러움으로 다가온다. 일보러 시중엘 나갔다 조금 늦은 시각 산사로 올라오다 조용히 잠드는 숲을 깨울 때면 자연에 사는 사람이 자연과 하나 되지 못하여 부끄러울 때가 있다. 잠이든 산은 그 거대함과 고요함이 가슴 속에 쌓인 모든 시름을 삭여주며, 한 낮의 더위가 물러가고 시원한 산바람이 피부에 와 닿아서 좋다. 한폭의 문인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모든 번뇌를 쉴 수 있어서 좋고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것 같은 포근함이 있어서 좋다.

 내가 채색의 한국화보다 문인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전기 없는 깊은 산속의 조용한 암자에서 그 분위기에 긴 시간을 함께하며 오래도록 즐거이 살아서 인 듯싶다. 오늘은 들음 없는 것을 조금 보여주고자 한다. 헷세는 싯다르타를 끝없이 듣는 사람으로 표현하여 한 노인이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파도 소리를 매일매일 듣는데, 그 것은 들음이 끝난 자리에 다다르려는 수행이었고 한 가지 일에 모든 일생을 바쳐 살 수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경이롭게 다가와서 나는 수행의 길을 지금도 이렇게 가고 있다.

 나는 요즘 들음 없는 경지에서 듣는 수행을 차를 운전하면서도 한다. 정속 100km로 달릴 때 나는 엔진소리와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 타이어 마찰음이 어우러진 소리를 즐겨듣곤 하는데 그 정속 주행이 계속 되고 있으면 선실에 앉아 있는 것처럼 정적에 감싸여 졸음이 오곤 한다.

  모든 것이 멈춰진 것 같은 그 순간들에서 졸음과 들음과 화두의 싸움은 계속되어 서울 길 3시간이 어느 순간에 지나간 줄 모르게 지나가고 들음 외에 고요에서 오는 졸음, 그것을 타파하여 화두와 소리 들음이 이근원통 삼매에 들어서 행해지는 것이 나의 요즘 수행의 일환이 되어 있다.

 화두의 의단이 있어 성성함과 적적함을 함께 갖추어 선정을 이루듯이 화두와 들음이 하나 되어 졸음을 쫓을 수 있고 모든 것이 멈춰진 적적함에 우리의 들음 공부는 완숙해지니 시간이 없어 불법수행을 못하던 때에서 벗어나 생활에서 불교를 완성할 수 있다. 정진을 못한다는 것은 현실과 정진을 이원화 시켰기에 선방에서만 좌선을 통하여 정진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우리를 부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이다.

  요즘 산에 오르자면, 4월 보름달이 유난히 더 커 보이고 밝아 보이는 것은 아마도 결제 때가 되어서 인가 보다. 결제 때면 왠지 숙연해지고 자신은 할 일 없으면서 왜 그 일 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끼는지, 또한 밖에 있으면 죄짓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무엇인가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아직도 남아있는 때문이리라. 그것이 오히려 함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함이 다한 사람이 그것을 계속하지 않으면 바른 생활이 아닌 것처럼 느껴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금강경에 “여벌유자 법상응사하황비법이리오”하였는데 계율(설법)이라는 것은 저 뗏목에 비유함과 같은 것 이어서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려야 편히 길을 가듯이 법도 버릴진대 오히려 법 아닌 것 일까보냐 하였다. 흔히 음식점에 들어가 보면 가려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이것저것 생각하면 고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별 그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도라 하였음이니 그저 다니지 말고 보지 말라는 제약으로 자신이 도를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도인인줄 착각하며 지내지 말았으면 한다.

  도를 닦는다고 선원에 있을 때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염불을 하며 기도 할 때도 존경의 대상이었는데 남은 것이 없어 가만히 있으니 존경이 사라졌다. 도 닦는 사람의 궁극은 고고함 이니라….

 <일출암 주지 석인돈여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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