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
흑사병
  • 승인 2004.06.11 18: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세만 해도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흑사병이었다. 흑사병이 한번 번지면 인구의 50% 이상이 죽어갔기 때문이다. 흑사병은 이집트와 중동에 유행했던 풍토병이다. 흑사병이 광대한 지역으로 대 유행한 것은 6세기로, 동지중해 유역으로부터 서유럽, 아일랜드까지 퍼졌다. 그 후 소규모 유행이 8세기 중간까지 반복된 후 300년의 공백을 두고 11세기에 다시 세차게 밀어닥쳤다.

 ▼흑사병은 인구를 격감시키는 사회변화를 가져왔다. 벼룩에 물린 상처로부터 옮겨지는 선(線)페스트 환자의 사망률은 30퍼센트에서 90퍼센트 사이의 수치를 나타낸다. 환자의 재채기나 가래에서 튄 균에 의해서 전염되는 폐 페스트는 치사율이 정확히 100%다. 1350년 전후로 한 유럽의 전 인구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없다. 그러나 신뢰도가 높은 J.F.C.헤커의 『중세의 전염병』(1859) 이라는 연구서에 의하면 약 1억에 달했다고 한다. 페스트에 의한 사망자 총수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숫자는 없었다. 당시의 기록자료를 그대로 믿는다면 1347년부터 50년 동안 전 유럽의 페스트사망자는 대략 2천5백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인구감소는 사회질서에 큰 전환을 일으키게 된다. 피렌체의 경우 전 인구의 3/5, 베네치아 3/4, 파도바 1/3가 격감했다. 거리는 텅 비고, 어떤 상인은 귀족의 재산을 접수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 시정(市政)도 전혀 경험이 없는 신참의 손으로 넘어 갔다. 한마디로 도시사회에서 진행된 대변동은 오랜 권위와 질서를 뒤 흔들어 놨다.

 ▼페스트의 충격이 사람들의 생사관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유런인들 사이에는 “죽음을 잊어버리라”는 경구도 나왔다. 때로는 이러한 돌림병을 퍼뜨리는 원흉이 유태인이라며 유태인 박해에 앞장섰다. 페스트 이후의 회화에는 최후의 심판이나 지옥이 소재로 한 그림이 등하기도 했다. 14세기 후반 이후의 르네상스의 방향과 색조, 그 중층 성은 바로 페스트가 가져온 충격 결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