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
12월의 독립운동가
  • 이보원 기자
  • 승인 2004.11.3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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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는 오의선(1889.12.8∼1931.5.6)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오선생은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풍에 따라 한학을 배우며 인격을 도야하였고,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명치대학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했다.

 일본명치대학에 유학하던 시절 재일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동경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포한 2·8독립선언에 적극 참여하며 민족 독립의식을 표출했다.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식 참여를 독려하고, 독립선언서를 널리 배포하며 2·8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2·8독립선언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참했다. 나아가 세칙제정위원, 청원법률심사위원, 예산결산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초기 임시의정원의 골격을 세우고 임시정부를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 지도기관으로 만드는데 힘썼다.

1921년 북경으로 옮겨가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계열의 인물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서북간도 및 노령지역의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통일에 노력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국내에 동지를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배후 지도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활동했다.

국내로 잠입한 뒤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민족혁명 이념으로 전파된 사회주의에 공감해 사회주의운동가로 변신했다. 더욱이 네 차례의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사회주의운동가들이 대거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자후원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나아가 국제혁명자후원회의 국내 책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힌 혁명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1931년 3월 향리인 용인에서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심한 고문으로 같은 해 5월 6일 옥중에서 42살의 나이로 순국했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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