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의의
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의의
  • 권태영<익산보훈지청장>
  • 승인 2005.04.12 1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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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4월 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86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3·1정신을 계승하여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0년 국권상실 후 9년 만에 우리 손으로 세운 우리민족을 대표하는 정부로서는 물론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의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이 오천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는 치욕을 당하자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1919년 3월 1일 거국적인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 만세시위 운동으로 수만명의 선열들이 목숨을 잃고 피를 흘렸으며,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은 절대 독립의지와 열망을 국내·외에 표출하였는 바, 그 뜻이 모여 이루어진 결정체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인 것이다.

  임시정부는 국내·외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광복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좌우합작이 필수 불가결한 요건임을 인식, 합작운동을 추진해 임시정부 내에서 만은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27년간의 오랜 기간을 남의 나라 땅에서 온갖 고난을 견디며,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립운동의 최초 기구로서 그 역활을 다해 왔다.

  그 주요 활동을 요약하면 독립운동에 대한 선전, 정보수집, 자금모집 등의 국내 국민들과 연계하여 독립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연통제를 실시했으며, 민족 동량의 양성을 목적으로 인성학교, 삼일중학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힘썼으며, 우리나라 대표기구로서 세계열강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펼쳤다.

  또한 만주의 독립군을 지휘 통솔하여 체계적인 독립전쟁을 벌이고자 하였으며,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육군무관학교를 세웠고, 의혈 투쟁을 벌여 침략의 원흉들을 처단하거나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는 등 적은 인원과 자금을 가지고도 큰 활동 성과를 거두었다.

  임시정부의 역경은 피어린 임시정부 27년으로 표현할 만큼 처절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경찰과 군대의 추적에 하루하루 목숨을 걸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매일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견디기 힘든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런 고통속에서도 임시정부는 민족을 대표하는 기구로서 꿋꿋이 자리를 지켜오며 우리나라 최초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함으로써 현재 헌법에서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규정한 바와 같이 민주공화제의 체제를 어어오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임시정부는 한국인 개개인의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의 통합을 시도하였다는 점, 실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8·15 광복까지 단절되지 않고 존재한 유일한 구심체였다는 점, 또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의지가 감상이 아닌 현실적인 요구라는 것을 보여준 실체로서 존재하였던 것이다.

  우리고장 전북에서도 독립유공자 나용균, 고판홍, 노진룡, 진장권, 박정석 선생 등이 임시정부와 관련한 독립운동 활동을 하신 바 있다. 특히 백봉 나용균 선생은 정읍 영원면 출신으로 임시정부 선포식에 전북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하신 분이다.

  지금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국내적으로는 경제도 어려울 뿐 아니라 특히 일본의 후안무치한 역사교과서 왜곡과 시마네현 의회에서 제정한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등 독도영유권 주장으로 온 국민들이 경악과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지금과 같이 국민적 통합이 절실한 시기에 지난 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헌신하신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거울삼아 민족적 결의를 하나로 뭉친다면 그 어떠한 외세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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