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약의 두 얼굴
광약의 두 얼굴
  • 승인 2005.04.1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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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봄, 향긋한 실바람 속에 봄 냄새가 부드러운 날이다. 나는 시간을 뚝 잘라내어 일행과 함께 용문산 산행에 나선다. 차 속에 일는 환희와 흥겨운 잔치 내 눈을 통해 바라본다. 손 벽치는 가운데 노래와 춤, 녹 익은 입담 속 술잔치에 일행은 묵은 먼지를 털어 겨울을 벗어낼 듯 하다.

 묵은 바람 밀어낸 술기와 좋은 분위기로 적당히 마셔, 취한 향기의 삶은 더 없이 풍요로워져 틈새를 이어줄 이치로서 영국 속담을 떠올리니 그 실감이 더 배가된다. 이를테면 한 잔 술 띄우니 하루의 기분이 좋아지게 되어 부족함 채워지고, 두 잔 술 띄워내니 건강에 더 좋아 화려한 왕관을 쓴 듯 가슴 벅차게도 되기 때문임은…. 그러하나 심기 불편할 석 잔 술은 건강을 잃게 할 수도 있다 하는 이 사실을 우리들은 가끔 잊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리다.

 예로부터 수많은 사연과 술의 뿌리에 대하여 어떤 이는 光藥(=영화롭게 되는 약)과 狂藥(=미치게 하는 약)사이의 두 ‘얼굴’로서 논리 정연하게 펼쳐 낸 술의 옛 향취를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그 원류는 제천 행사시 하늘과 함께 취해 재앙을 막은 동 시대 그들 삶의 풍요를 기원함에서 광약으로서의 의미와 체념 같은 것이었으리라.

 더 눈여겨보니 맑고 투명한 서양 신화에선 박카스(酒神) 와 디오니소스 神이 아가리오스 신에게 술 빚는 비법 등을 전수해 주었으나 후자의 신은 자기가 만든 술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狂藥으로서의 세계를 열어준 계기가 되고 있음에서이다.

 그 명암의 기대 속에 서서 우리의 현대 사회는 무엇을 기원함에서 또 어떤 未明을 밝혀내 보려고 常時 술 권하는 문화를 지속시켜 나가려 하는지 의문만 커져 간다.

도대체 현대인의 각종 스트레스가 문제인가, 아니면 일방적인 잦은 회식문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고압적이며 피할 수 없는 각종 모임과 짧은 시간 내에 확 달아오르게 하는 ‘폭탄주’등 권위주의 물결침 속에 ‘빨리빨리’식의 악행사유로서 술 권하는 악습으로 익숙해졌음이라고 유추 해 본다.

 아무튼 술 권하는 사회의 안을 드려다 보니 실로 크게 문제가 될 그 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안했다. 문자 그대로 ‘藥酒’로서의 보약의 의미만 있었으며, 또 인간과 농경의 신을 밀접히 매개시켜 ‘풍요와 안빈’의 중요 연결 구실을 하고 있었음이 동서 고래 이래로 맥락은 이어져왔다.

 또한 성경에서도 포도주는 곧 하나님 그 분의 ‘피 역할’을 대신하면서 신성함의 상징이라고 또박또박 가르쳐주었고, 동서양 지상 최고의 미학으로 찬사를 받은 술은 불타는 듯한 화끈한 의미인 ‘수불’에서 ‘수울’을 거쳐 ‘술’로 정착되었음이 우리의 일반적인 한글 어원임도 확인된다.

 요는 술을 마시는 사람의 마음과 몸속에 정열과 불길을 만들어 낸다는 지시 등을 떠올린다면 그 사실에 각성과 주의를 언제나 기우려야 할 것이리다. 우리들 일행은 歸行 길에 들어서고 있다. 나는 술의 표상을 자연현상인 하나의 “비‘에 비유한 중국의 예화처럼 만일에 비가 흙에 내리게 되면 진흙을 더럽히지만 옥토에 내리게 될 때면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의미를 떠올려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술에 대한 잘못 된 이해와 올바른 주도를 배우지 못한 현대의 술 문화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교훈으로 떠올리어 본다. 그러니까 세월을 새김질한 ‘채근담’에서의 엄연한 사실은 “꽃은 반만 피었을 때가 가장 아름답고, 술은 적당히 취해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한 이 어구 앞에서 모든 것은 순조롭고 귀담아 들을 만한 사연들이리다. 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사코 술 권하는 사회의 악습과 광약이 지닌 두 ‘얼굴’의 문제점을 항상 뒤돌아보고, 바른 생각을 하면서 아름답고 기품 있는 문화생활을 만들어 갈 줄 아는 현대인의 생활을 기대해본다.

양영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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