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의 반란’에 대한 소회
‘딸들의 반란’에 대한 소회
  • 전정희
  • 승인 2005.08.0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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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1일, 대법원은 여성도 종중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용인 이씨 사맹공파, 청송 심씨 혜령공파 출가 여성 8명이 “여성에게도 종중원 자격을 인정해달라”며 종친회를 상대로 각각 낸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이 판결에 의해 6년을 끌어오던 이른바 ‘딸들의 반란(소송)’은 대성공으로 평가되어 화려하게 매스컴을 장식하고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혹자는 “대한민국은 이제야 딸들을 해방시켰다”고까지 의미를 부여하였고, 소송을 제기한 여성들은 마치 양성평등의 전사라도 된 것처럼 부각되었다.

유림을 비롯해서 남계 혈통의 관습에 철저한 사람들일수록, 종중에 분배할 재산이 많은 경우는 더더욱, 그 충격의 강도가 컸다. 호주제 폐지와 더불어 이번 판결은 ‘이제 대한민국에 더 이상 남성 우월주의는 없다’라는 메시지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번 판결은 출가외인의 관념에 지배당했던 우리 어머니 세대의 의식이나, 부계혈통만을 강조하여 결혼과 더불어 호적을 남편에게로 옮겨가야 했던 호주제하에서의 여성지위와 비교해볼 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재산 처분에 관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다고 해도, 이번 판결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종속적인 존재로 여겨져왔던 여성들에게 가문의 일원으로서 당당한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판결의 결과에 환호하는 사진을 바라보면서 왠지 씁쓸한 생각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소송이 하필 종중의 재산분배와 관련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애를 써서 그들이 획득한 지위가 부계를 중심으로 ‘성과 본’을 정한 족보에 편입되는 것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권리에는 필연적으로 의무가 수반되지만 이번 판결은 권리는 모호한 대신 의무는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의 판결문에는 “공동선조의 분묘수호와 제사,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한 종중의 본질에 비춰 공동선조의 성과 본이 같으면 성별과 무관하게 종원이 돼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제 종중의 재산분배를 요구했던 여성들은 친가쪽의 ‘분묘수호와 제사’라는 새로운 의무를 짊어져야 할 판이다. 가족들과 얼굴을 붉히면서 일구어낸 승리이므로 그들은 그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소송과 판결을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양성평등을 실현한다는 것이 남성들이 구축해놓은 부계혈통의 계보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인가? 혹여 그것은 재산을 분배받고자 하는 이기심에 양성평등이라는 그럴듯한 옷을 입힌 것은 아닌가? 왜 재산분배가 있기 전에는 종중원이 되고 싶지 않았는가? 그리고 분배받을 종중의 재산이 없는 여성들은 왜 종중원임을 주장하지 않는가?

우리가 일구어내려고 하는 미래지향적인 양성이 평등한 사회는 여성이 종중의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가문과 족보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성별을 떠나 ‘나’라고 하는 독립적인 자아를 존중하고 ‘나’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서 평가받고 보상받는 삶, 그러한 과정에서의 당당한 권리찾기, 그런 것들이 아닐까.

여성이 미래세계 변화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여성들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연의 문화’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창회로부터, 종친회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소신껏 행동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이다.

세계로 뻗어나가야 할 글로벌 시대에 족보라는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양성평등을 외치는 것은 넌센스다.

(전북발전연구원 여성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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