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준 "카메라앞에 버려진 아이였다"
배용준 "카메라앞에 버려진 아이였다"
  • 승인 2005.08.24 22: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터뷰를 하러 롯데호텔 30층으로 올라갔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일본 아줌마 팬 네 명이 얌전하게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상황을 보니 앞으로도 몇시간이고 그 자세 그대로 조용히 앉아 있을 태세였다.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욘사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잊으려고 하면 이렇게 순간순간의 그의 '영향력'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배용준. 이제는 아시아를 움직이는 그와 실로 오랜만에 '독대'를 할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너무나 몸집이 커져버려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마주앉은 그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태도는 진지했고 답변은 성실했으며 미소는 광고 속 그대로였다. 다만 한가지. 전날 공개된 영화 '외출'의 후유증을 생각보다 훨씬 심하게 앓고 있었다. 단적으로 전날 두 차례나 있었던 '외출'의 시사회를 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영화를 찍었길래.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다음은 일문일답.

--무대인사만 하고 정작 시사회를 보지 않은 이유는 뭔가.

▲두렵고 떨렸다. 어제 무대인사에서 "이제 영화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전에는 흥행이나 반응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내가 캐릭터를 잡아가고 생각했던대로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알잖나. 항상 준비하고 그것에 갇혀서 하는 스타일.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다 버리고 연기를 했으니 그 결과가 너무나 두렵다. 오죽하면 촬영 끝나고 병원에 입원했겠는가. 낮 기자시사회는 그렇다 치고 저녁 시사회를 앞두고는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가를 다녀왔다. 그것이 어느정도 핑계가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 영화는 언제 볼 생각인가.

▲여러가지 계획을 갖고 있는데 어차피 내가 보게 되면 알려지지 않을까.(웃음)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가.

▲카메라 앞에 버려진 아이 같았다. 감독님의 "한번 (마음껏) 해봐"라는 말이 정말 무서웠다. 감독님은 되게 나긋나긋하게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해요?"라고 물으면 "아니, 그냥…"이라며 카메라를 돌렸다. 항상 상황과 캐릭터에 몰입하기 전 먼저 계산하고 설정했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어느 순간 잘 적응하고 있지 않았나.

▲그렇다기보다 감정을 분출하는 게 옛날에는 정말 어려웠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분출하고 표현하는 연기가 더 쉬웠다. 내가 그렇게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이 희한했다.

문제는 그런 장면은 두세개 뿐이었다는 것이다. 복잡 미묘한 감정 연기들이 대사도 표현도 없이 이어졌다. 한 장면을 30번, 60번씩 촬영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인수라는 인물 자체가 결국 내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촬영이 끝났어도 더 할 얘기가 많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느낌은 정말 처음이었다. 또 이때껏 단 한번도 애드리브를 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하나 계획 안된 게 없었는데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어느 순간 내가 상대 배우를 당황시키고 있더라.

--진짜 힘들어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이제는 인물을 놔줘야할 것 같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그런데 이번 작품 하면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우울했고 뭐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럽고 짜증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봤더니 내가 그 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 것이었다. 연기하면서 그 사람이 온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지금까지는 매번 작품 끝나면 여행을 갔는데 이번에는 아무데도 못 갔다. 너무 허했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9월 11일을 '외출'에서 탈출하는 날로 잡았다. 그때쯤이면 '외출'에 대한 모든 홍보나 스케줄이 끝난다.(웃음)

--출연을 결심했을 때의 느낌과 영화를 다 찍고 난 느낌은 어떻게 다른가.

▲처음에는 오로지 허진호 감독님과 작업하고 싶었다. 그 작업을 통해 얻고 싶었던 것이 너무 많았다. 그 후 시나리오를 보면서는 감정들이 세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찍으면서는 이렇게 절제될 줄 몰랐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연기가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아내의 불륜을 알고도 끝까지 돌보는 인수를 이해하는가.

▲책임감이었던 것 같다. 인수 자체가 굉장히 착하고 건강한 사람이다. 아내도 많이 사랑했고. 실제의 나라도 병상의 아내를 버리고 떠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오히려 공감하기 힘들었던 것은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한테 끌렸다는 것이다. 인수는 서영을 사랑했던 것 같지 않다. 어쩔 수 없는 끌림은 있었지만.

--무척 보수적인 것 같다.

▲그렇다. 보수적이다. 그러니까 인수와 같은 상황에서 복잡하고 우유부단하게 나오는 것이다. "저 여자한테 어떻게 해야되지?"라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하는 나도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촬영하고 나서는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사랑에 대해 색다른 경험을 한 것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여태껏 연기도 틀에 갇혀서 리얼리티를 내 식으로 표현했는데 조금은 폭이 넓어진 것 같다.

--얼마전 대만을 다녀왔다. 여전히 식지 않는 인기가 새삼스러웠을 것 같다.

▲작년보다 좀 더 가까워지고 친근해진 것 같다. 그만큼 한국문화 자체가 더 친숙해진 것이다. 이제는 '한류'를 하나의 흐름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이 흐름 자체에 어떤 변화를 주고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를 봐야한다. 언론도 일방적으로 한류에 대해 '정복'이니 '정벌'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이 흐름 자체가 아시아의 교류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한류가 아시아 문화 공동체를 만들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시아를 아우르는데 있어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혼자 개척해가고 있다. 부담감은 물론이고 고독감을 많이 느낄 것 같다.

▲원래 삶 자체가 고독해서….(웃음) 어느 순간 삶이 무겁고 버겁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게 그런 역할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왕 하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해보고 싶다. 물론 언제가는 또 버거움을 느낄 지 모르겠지만.

--벌써 안티 한류의 바람이 거세다.

▲만약 우리나라가 반대의 경우에 처했다면 안 그럴 것 같은가. 한류를 일방적으로 포장하면 상대방은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호 문화를 공유하고 보완할 것을 보완하면 교류는 확대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일본, 홍콩 문화가 대단한 인기를 끌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우리들부터가 한류를 교류라는 차원에서 더 큰 움직임으로 만들어가야간다. 그러다보면 아시아 전체에서 한류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일본에서의 영향력은 언제까지 갈 것이라 보는가.

▲지금 살기도 힘든데 그런 생각 안해봤다. 현재를 즐기고 이 순간에 만족하고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뒤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고민할 것도 많다.

--'외출'에서도 또 애틋한 사랑을 펼쳐 일본에서의 반응이 좋을 것 같다. 해외 팬들의 반응과 기대가 캐릭터 선정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끼치지 않나.

▲그렇지 않다. '스캔들'에서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나. 앞으로도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하기 어려운 연기에 도전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하고 싶다. 사진집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실린 사진들을 여성들이 좋아하나? 그렇지 않다. 나 자신에게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보여주는 부분과 생활에서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면 될 것 같다.

--아시아 문화 교류를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나.

▲이전에는 시스템적으로 공동작업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많이 보완됐다. 대만을 방문했을 때 '할리우드 진출 의향은 없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인정받는 것이고 나아가 아시아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그동안은 아시아 문화를 공유할 자본과 시장성이 부족했지만 지금은 많은 여건이 좋아졌다. 언젠가는 미국에서 아시아 영화에 대항해 스크린쿼터를 할 수도 있다. 그런 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게 앞으로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멀리는 아시아 공동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아직 한국에서도 같이 작업하고 싶은 감독님들이 너무 많지만 이 흐름 자체가 없어지기 전에 공동작업에 손을 대야하지 않을까.

--차기작 '태왕사신기'는 왜 출연을 결심했나.

▲후속작을 미리 정해놓은 것이 처음이다. 광개토대왕이라는 타이틀을 들었을 때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김종학 감독-송지나 작가와의 작업도 기대된다. 해보고 싶은 얘기다.

--배용준이 결혼하면 일본 여성들이 난리가 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가, 연애나 결혼 생각은 없나.

▲아니다. 그들도 내가 빨리 결혼해서 애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더라.(웃음) 나도 가정을 예쁘게 만들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안할 수가 없는 것이 이렇게 바쁘게 다니다가 집에 혼자 들어가 있으면 정말 쓸쓸하다. 진짜 외로움, 고독함이 시간을 더해갈 수록 깊어지는 것 같다. 20대에 느꼈던 것과 지금 느낌은 또 다르다. 그런 부분들이 친구를 만난다고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한계가 있다. 내 생활이 그렇다. 예전에 두달간 외국 파파라치가 서울에서 날 쫒아다녔는데 나중에 "공개할 게 없다"고 그러더라. 체육관 가고 집에 가고 사무실 가고…. 정말 생활이 그렇게 단조롭다. 그러다보니 볼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된다. 또 성격 자체가 어디 파티에 가서 어울리지도 못한다. 그래도 한가지. 일과 끝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나면 내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간다. 일단 힘이 생긴다. 팬들이 남긴 글은 내게 매일 먹는 비타민처럼 힘을 주준다. 내 스스로가 나를 만들어가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 가족들이 나를 만들어가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