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語의 한 구절을 되챙겨 본다
論語의 한 구절을 되챙겨 본다
  • 승인 2005.09.08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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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선인들은 공자(孔子.BC 552∼479)를 대성인으로 받들었다. 유림에서는 공자의 말씀에 어긋나는 언행이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매도하였다. 지금도 향교에서는 춘추로 제사를 받들고 있다. 석전제(釋奠祭)가 그것이다.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갖는 제례다. 이 공자가 지난세기 들어 중궁에서 조차 설자리를 잃게 되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해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는 말까지 나돈바 있었다.

 중국에서는 최근 공자를 되살리는 운동이 일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달 28일 공자탄신 2556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펼치리라고 한다. 이른바 70년대 문화혁명으로 거세었던 ‘비공’(批孔)의 바람이 ‘비공’(庇孔)으로 풍향을 바꾼 셈이다. 방향을 바꾼 바람은 공자를 다시 받들어 비호하자는데 있다.

 공자의 한생은 73세였다. 그의 평생 언행은 논어에 담겨있다. 논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3세기 백제때의 일이다. 왕인(王仁)박사에 의하여 일본에 전하여졌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이다. 일본의 한 유학자(伊藤仁齊,1627∼1705)는 이 책을 ‘최상지극 우주제일서’(最上至極 宇宙第一書)라고까지 말하였다. 사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동양 3국에서는 사람살이의 한 고전으로 받들어 왔던 것이다. 말하자면 행동규범의 지침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논어를 오늘에도 금과옥조로 삼자는 것은 아니다. 따지자면 걸맞지 않은 케케한 조항들도 있기 때문이다.‘논어를 읽고도 논어를 모른다’는 속말이 전한다. 고전으로서 찬찬히 읽어 공자의 인(仁)의 정신만은 오늘의 시점에서도 되 챙겨야 하지 않을까. 그중의 하나로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경공(景公)과 공자와의 문답항을 들고 싶다. 공자의 30대에 있었던 일이다.

 정사(政事)를 묻는 경공에게 공자의 대답은 간단명료 했다.‘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의 여덟자에 불과했다. 오늘의 뜻풀이자면 ‘대통령은 대통령 다우며, 공직자는 공직자 다우며, 어버이는 어버이 다우며, 아들딸은 아들딸 답게 그 구실을 다하게 하는 것’ 이 바로 정치라는 것이다. 공자는 당시 제나라 사회질서의 문란상을 꿰뚫어 보고서의 말씀이었다. 경공이 제 구실을 못하고 대부(大夫)가 임금을 무시하고 정권을 좌우하던 때였다고 한다. 오늘이라고 사회질서와 기강이 없는 정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논어의 저 구절을 다같이 다시 음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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