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는 영혼?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는 영혼?
  • 조한경
  • 승인 2005.09.13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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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 전 아이들과 큰 다툼 끝에 텔레비전을 집에서 끌어냈다. 어떤 때, 숙제는 밀렸는데도 리모콘을 손에 쥐고 서로 싸우는 모습이 보기 싫기도 했지만, 또 어떤 때, 아이들은 안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숨죽여 가면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내 모습이 갑자기 싫어진 것도 이유였다. 한 때는 텔레비전이 가족의 끈을 이어주는 매체 구실을 하기도 했다. 5가족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자체로 이게 가족이구나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온 가족이 손을 마주 잡고 드라마 ‘천국의 계단’을 시청하면서 함께 행복해 하기도 했었다.

 텔레비전을 없애고 나니 우리 집 큰 사람이 나가고 없는 것 마냥 텔레비전 있던 자리가 휑하니 허전했다. 처음에는 무척 서운했다. 아니 서운하다기보다 시선을 둘 데도 마땅치 않았고, 몸조차 거추장스러워진 듯했다. 방에 들어가 쉬다가, 거실을 어슬렁거리다가, 부엌에 가서 우유도 한잔 마시고... 해도 시간은 여전히 8시를 못 넘기고 기웃거렸다. 그러나 적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아내는 늦둥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고, 중 3, 고 1 두 아이들도 금방 미련을 버렸다. 문제는 오히려 나였다. 스포츠와 뉴스를 즐겨 시청한 나였기에 부엌을 오가며 지금 이 시간은 뉴스! 지금 이 시간은 축구! 박찬호 야구! 밤이면, 토크 쇼!….

 그러나 할 일이 없으니 결국 책 한권을 손에 집어 들게 되었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 책은 아내가 전부터 내게 읽으라고 권한 책이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구석에 방치해 놓았었다. 내 생활 패턴이 한 가지 이유였다. 나는 내가 학교 연구실에서 책을 읽을 만큼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집에 와서는 ‘당연히!’ 휴식을 취했다. 그래서 집에서는 아이들 뒤치다꺼리 아니면 텔레비전 시청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은 더 큰 이유인데, 책의 저자가 어느 교회 목사의 사모였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가 설교 듣는 것도 만만찮은데 그 딱딱한 교리를 집에서마저….

 그러나 ‘울고 있는 사람…’은 나로 하여금 텔레비전을 ?i아내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사랑하는 남편을, 아내를, 아들을 잃고 마음 아파하는 이웃들과 모진 질병과 가난, 실패로 오늘의 삶이 버거워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지친 영혼들에게 작은 희망과 빛이 되고자” 쓴 저자의 글들은 내게는 너무 참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영혼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책의 첫 글은 입양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 목사 부부에게는 아이들이 넷이다. 두 아들은 저자가 낳았고, 두 아이는 입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양한 아이들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이란다. 말이 선물이지 사실은 아니 우리가 볼 때는 아내를 사별한 어느 뜨내기 교인이 병으로 죽자 다른 선택이 없어 맡은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벅찬 기쁨을 느끼면서 아이들을 맡는다. 아들만 둘이던 19평, 비좁은 방 둘에 부엌 겸 거실 하나인 19평 그녀의 아파트엔 여섯 명이 살기 시작한다. 안방 하나는 아들 둘과 입양한 아들 하나가, 작은 곁방은 입양한 딸 하나가 -방 하나를 입양한 딸이 온전히!- 차지하고 목사 부부는 거실에서 거처한다. 오! 마이 갓!

 그래도 그녀는 불편해 하거나 불평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보다 그녀의 기쁨을 더 잘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 여기 인용해 보겠다.

 “나는 지금도 누가 ‘자녀가 몇이세요?’라고 물으면 ‘아들 셋, 딸 하나’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물론 그 말에 ‘와! 요즘 세상에 무식하게 넷이나 낳았네’ 하는 소리가 이어질 것을 알지만 말이다. 나는 어버이날에 네 개의 카네이션을 하루 종일 가슴에 달고 다닌다. 그러면 여지없이 ‘젊은 여자가 촌스럽게 저게 뭐야’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 때 나는 ‘그래! 난 촌스러워. 촌스러워도 좋아! 카네이션 네 개나 받을 수 있는 엄마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그래.” 오늘날 보통 여자들의 사고방식 그리고 삶과는 너무 편차가 큰 그녀의 글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함께 울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전북대 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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