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의 추억들
가을밤의 추억들
  • 이학구
  • 승인 2005.09.2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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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열 나흗날 밤 보름달이 막 떠오른다. 약간 흐린 날씨 때문에 쟁반같이 둥글긴 하지만 윤기 오른 산뜻한 노란색으로 탐스럽지 않아 아쉽다. 홍시가 덜 된 감처럼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덩치 큰 먹구름 떼들이 밀려오더니 달을 감춰버린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달을 보며 하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달과의 만남을 훼방 놓는다.

언뜻언뜻 달이 보일 때마다 한없이 너른 들녘의 익어가는 나락들의 모습도 보인다. 벼들도 잠을 충분히 자야만 결실을 잘 맺어 풍년이 된단다. 그러기에 동네의 가로등은 모두 꺼버려 어둡다. 먼 동네에서 비치는 불빛들만이 더욱 선명하고 밝게 보인다. 다른 고장에서는 비가 많이 오고 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시원해야 할 한가위 전날 밤이 무척이나 끈적거리고 덥다.

집을 나와 옛날에 친구들과 자주 놀던 ‘수문’이 있는 다리를 찾았다. 꽤나 넓은 용수로를 가로지른 다리다. 아마 일제시대에 갯벌 간척사업 할 때 만든 다리일 것이다. 그 다리의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걸터앉아 극성맞은 모기떼를 부채 하나로 쫓아내면서 꿈을 키우던 곳이다. 지금은 그 친구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만난지 오래 됐지만 그 모습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친구도 몇 명이나 된다. 가난을 면해보려고 고향을 떠난 친구들이 많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지만 아직도 변변찮게 사는 친구들도 많다.

그 때는 식수로 사용할 만큼 물이 깨끗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옷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었다. 낮 동안 햇볕에 데워져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온갖 물고기나 물 속 생물들이 많이 살았었다. 여름이면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아서 매운탕을 해 먹기도 하였으며, 겨울에는 좋은 빙판이 되어 스케이트나 썰매를 탈 수 있어 훌륭한 놀이터가 됐었다. 붕어는 말할 것도 없었고 참게, 새우, 메기, 가물치, 장어 등이 많았다. 잠자리, 물방개, 소금쟁이, 물매암, 물장군 등 곤충류도 참 많았었다. 바닥에는 말조개가 바닥에 긴 선을 그으면서 이동하고 녹색말 투성이 우렁들이 수초에 매달려 있었다. 어린 꼬마들도 물속을 걸어만 다녀도 참게가 발바닥에 밟혀 잡아내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 물의 색은 옅은 흑갈색의 오염수로 되어버렸다. 오염에 강한 생명들만이 버티면서 살고 있지만 언제 이것들마저 없어질지 모른다. 물속에서 멱을 감는 애들은 없다. 물속에서 고기를 잡는 모습도 볼 수 없다. 더운 날 밤에 옷을 훌훌 벗고 멱을 감는 젊은이들도 없다. 여기저기서 ‘첨벙’ 뛰어 오르던 물고기의 힘도 약해졌다. 이 곳에 놀러오는 발길도 끊긴지 오래 되었다. 어린이나 젊은이 등 사람 수도 줄었지만 TV나 컴퓨터 등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게 해준다. 선풍기는 말할 것도 없고 몇 집에는 에어컨도 있어 구태여 더위를 피할 장소도 필요 없게 되었다.

혼자 찾은 이 곳에 산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댄다.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들도 갈 길이 먼지 쉬지 않고 빠르게 흘러간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벼이삭끼리 스치는 소리가 없다면 너무 조용해서 두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크리트 구조물위에 앉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인심과 환경을 생각해 본다.

‘언젠가는 인류가 자연으로 돌아갈 날이 있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물질문명의 발달 끝자리에는 과연 무엇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언젠가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다. 어둔 밤에도 힘찬 물고기들의 도약의 큰 소리가 들리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 옷 훌훌 벗고 ‘풍덩’ 뛰어들 수 있는 날이 왔으면…….

<김제 원평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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