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시력으로 보는 세상
적당한 시력으로 보는 세상
  • 임용택
  • 승인 2005.10.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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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시력이 약한 사람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어느 날 밤 운전을 하던 중 옆자리 집사람이 건네는 안경을 써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군산에 거의 다가 왔을까하는 시점에서 눈이 침침하다는 말에 집사람이 자기가 운전할 때를 위해 걸어두었던 안경을 써보란다. 무심코 받아 써보고는 깜짝 놀랐다. 멀리 가까이 보이는 불빛들의 모습이 다르다. 솜사탕같이 그저 둥근 덩어리로 알았던 가로등 불빛들에 살이 돋아 있다. 한 가운데의 등과 주변의 빛살이 구분이 된다. 정말 경이로운 광경이다. 그러나 곧 안경을 벗어버렸다. 물론 자유롭기를 원하는 콧잔등의 요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안경 없이 보았던 불빛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구태여 좋은 시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시력이 좋은 사람들이 많다. 검은 점을 감추려 애쓰는 여인네의 두터운 화장발도 통하지 않는 시력, 다른 사람의 흠이 너무나 분명히 보여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안 해도 될 상처를 건드리게 하는 시력, 다른 사람의 행동에서 유난히 당사자가 의도하지도 않은 부문까지를 보아 신경을 건드리게 하는 게걸스런 시력….

 많은 사람들이 시력 좋음을 자랑으로 여긴다. 물론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즉 시력1.5보다 2.0이 좋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보지 않은 게, 보이지 않는 게 좋을 일에 까지 그 너무 좋은 시력을 들이댄다. 모르는 게 약일 수가 있는 것을 굳이 알아서 독이 되고, 그동안 쌓아왔던 관계나 우정에 금을 만드는 것이다.

 수년전 미국에서 1년간 체류 중에 외국인들을 상대로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직업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주로 수년을 미국에서 살아 의사소통은 지장이 없으나 기본이 부족하다며 배움 현장에 나선 한국, 일본, 동구권 등으로부터 온 외국인들과 영어 강의를 듣던 중에 있었던 해프닝이다.

 여러 선생님들 중 한 여성 미국인선생님의 다소 구어적 문법과 나의 어설픈 영어회화실력이 화근이 되었다. 문법위주의 공부를 해온 한국인 특히, 나의 눈에 오류가 포착이 되었고, 나는 잘못을 지적한다기보다는 말할 기회를 한번이라도 더 가져 회화실력을 증진시키려는 욕심으로 당시 매우 우회적으로 지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어설픈 회화가 매우 미묘한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여 전달되었을 리가 없다. 그녀는 매우 불쾌해하며 반박을 하였고, 나는 아차 실수하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국 현장에서 구어적으로 그렇게 쓰면 된다.’고 하면 될 텐데 왜 저리 얼굴을 붉히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급기야 ‘학자이기 때문에 picky하다’는 표현까지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이르자 나 역시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보지 말아야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육자로서의 성급함, 양식, 고집 등. 그러나 그러한 부분을 거론하지도 않고, 당신이 나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고 애써 변명을 하여보았지만 그 감정은 결코 과거로 가지 못함을 보았다.

 “아무리 강한 햇살도 자신이 만든 그늘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시력이 너무 좋은 사람만 있다면, 이 세상은 낭만이 없다. 여유가 없다. 바쁜 생활 속에서 한번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며 모든 동작 멈추어 설 필요가 있다.

 강한 시력의 방향은 자신에게 돌리고, 다른 사람을 보는 시력은 약간 낮춘다면, 주변이 적당히 안개 처리되어 안개꽃 속에 뒤로한 장미꽃처럼 더욱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군산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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