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헌화가
③ 헌화가
  • 이동희
  • 승인 2006.01.3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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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행복에 이르는 비밀통로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견우노인(牽牛老人)「헌화가(獻花歌)」전문 

 순정공(신라 제33대 성덕왕 때의 사람)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던 중 바닷가 절벽 아래서 점심을 들고 있을 때, 그의 아내인 수로부인(水路夫人)이 벼랑에 피어 있는 꽃을 보고 갖고 싶어 하자, 그 때 암소를 끌고 지나던 한 노인이 이 노래를 부르며 그 꽃을 꺾어 바쳤다고 한다.(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

 이 노래에는 원초적인 사랑의 디테일이 모두 담겨 있다. 사랑의 주체인 견우노인, 사랑의 대상인 수로부인, 사랑의 삼각관계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순정공, 사랑의 매개체를 상징하는 꽃, 삼각관계로 인하여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의 난관-역경을 의미하는 벼랑, 자기몰입-자기열중에 빠져 있는 수행자를 암시하는 암소, 적나라한 사랑의 실현공간을 상징하기에 과·부족하지 않은 자줏빛 바위 등등, 이 노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시적 요소들이 사랑가를 형성하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들로 합집합을 이루고 있다.

 문제는 견우노인으로부터 출발한다. 소를 끌고 가던 노인, 하필이면 그것도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 혈기 왕성한 젊은이가 아닌 노인, 견우노인은 그런 제한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주체자로서 자못 비장한 결의를 밝힌다. 사랑의 결단은 모두가 비장하고 비극적이다.

 견우노인은 노인임과 동시에 암소를 끌고 가던 사람이다. ‘견우(牽牛)’는 곧 ‘심우(尋牛)’다 그러므로 ‘소를 끌고 간다’는 것은 곧 ‘소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소는 도가에서는 유유자적, 유가에서는 의(義)를 상징하지만, 불가에서는 ‘인간의 본래 자리’를 의미했다.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비유한다. 노인은 소(인간의 본성)를 찾아가는 수행자다.

 그런데 이 노인은 바로 그 본성을 찾았다는 것이 아닌가! ‘잡은 손 암소 놓게 하시는’이 함축하는 바는 바로 그 본래적 본성을 찾았다는 것이 아닌가! 그 본성이 바로 벼랑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을 꺾어 바침으로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벼랑의 아름다운 꽃을 원하는 수로부인의 바람에 응답하는 일이 바로 본성을 찾는 일이라 하지 않는가! 그것도 고을의 태수를 지아비로 둔 여인에게 ‘꽃바치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본래적 자아를 찾는 일이 곧 사랑을 실현하는 일이라면, 노인이야말로 죽음을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가장 성스러운 삶의 행위로서 꽃을 꺾어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행위는 모두가 비장하고, 그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도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랑은 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사랑의 위기는 바로 사랑의 위험과 사랑의 성취라는 기회를 동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견우노인은 이 사랑의 함정을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면서 사랑의 성취를 이룩하고자 하는 열망을 내연(內燃)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암소를 끌고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듯이, 사랑의 본성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견우노인들도 사랑을 찾는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이 저 신라의 로맨스처럼 암소의 고삐였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현대판 견우노인들이 행여 물질의 질긴 심줄이나, 무망한 허욕의 실타래나, 눈 먼 육욕의 몸부림을 풀어 줄 수로부인이나 찾는 것은 아닌지?

 사랑은 사람의 본성을 찾아 소를 끌고 가는 견우노인이나, 한 꽃송이로도 자신의 생애를 바꿀 수 있는 수로부인이 아니고서는 감히 얻기 어려운,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비밀 아닌 비밀통로다. -(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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