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는 우리 얼의 벼리이다
국어는 우리 얼의 벼리이다
  • 김용재
  • 승인 2006.02.0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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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어느 농촌 이야기.

 아내를 구하지 못한 농촌 총각은 거금을 들여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로 원정을 가서 짧은 기간에 배필을 정해 들어온다. 이 과정에서 결혼 정보업체와 실랑이도 있다. 농촌 총각의 원정 결혼의 힘겨운 싸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집 온 여성은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의사소통이 어렵고 문화환경도 달라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남편의 적극적 보호와 사랑을 받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2세 탄생과 함께 또 다른 고민과 갈등이 시작된다. 바로 언어 문제이다. 아이들은 아빠보다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은데,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외국인 엄마들은 몸짓 언어와 자신의 모국어로 아이를 가르치기가 쉽다. 엄마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먼저 접한 2세들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동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학교 공부에 적응하고 아이들의 문화세계에 동참하기까지 이들 2세들은 심리적 압박감에서 아동기를 보낸다.

 엄마가 습득한 불안정한 한국어는 2세에도 영향을 주어 자칫하면 이들 가정만 통하는 생활언어가 형성될 수도 있다. 어느 지방에서는 외국인 여성을 위한 한국어 교육과 한국문화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단체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는 농촌의 국제결혼이 소수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회의 단면이라는 것을 인지한 적극적 대처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매체인 동시에 문화와 사고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농촌에 와 있는 외국인 주부들에게 적극적으로 우리말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둘, 어느 학교 이야기.

 김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 달리 유독 우리말과 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정국, 전쟁과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이 소홀이 한 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한다. 전진과 속도, 개발과 발전의 기치 아래 매섭게 내달았던 근대화 과정과 경제 발전의 기적에 뿌듯해 한다. 한 세기가 지나고 갑자기 세계화, 정보화라는 큰 명제가 가슴을 조이는 듯하다. 김 선생님은 그래도 학생들에게 자신의 소신을 펼친다.

 우리의 언어가 죽으면 문화도 죽는다. 문화가 죽으면 나라도 망한다. 평범한 말이지만, 다양한 사례를 들어 목청껏 학생들에게 강조한다. 그는 국어 선생도 아니다. 그래도 민족과 국가의 운명에 대해 언어를 통해 파악한다. 영국은 영어와 셰익스피어를 살려서 선진 국가를 만들지 않았느냐. 프랑스 파리 길거리에서 아무리 유창한 영어로 길 안내를 받아보려고 해 봐라. 그들은 프랑스어로 대답한다. 영어를 알아들었어도 자신의 언어로 말하면서 외국인을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세계로 이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영어 하나 배우면 먹고 사는 데 문제없다고 조기 영어교육이 판을 치지 않는가. 참 슬프다.

 김 선생님과 같은 분은 우리나라에 수없이 많다. 그래도 아이들 입에서는 외계어가 판을 친다. 일반인의 담화 구조에서도 한국어 단어와 문장이 죽고 있다. 작년 ‘국어기본법’이 제정되고 난 후, 그 후속 정책을 마련하면서 정부기관에 국어 책임관 두기, 공문서의 한글 사용 장려, 전문용어의 한글 표준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사 배출, 국어능력 검정, 국어 상담소 운영 등 엄청난 일들이 제기 되었지만, 아직도 일부 국어학자들 논란 속에서만 맴돈다. 실질적인 성과가 나와야 할 때이다. 그 중에서도 하루 빨리 국어 상담소를 설치 운영하고, 공공기관이나 학교에 전문적인 ‘국어 순화 학예사’ 또는 ‘국어 상담사’를 배치해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모든 국민이 입말이나 글말을 바르게 쓸 수 있게 지도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100년 전 단재 선생이 애국 계몽운동을 하며 제일 먼저 추진한 일이 한글보급운동이었다. 민족사학자요 성균관에서 한학을 공부한 이가 어찌하여 나라를 살리는 길이 ‘진서’(한문)교육이 아닌 ‘언문’(한글)의 보급에 있다고 했을까. 그는 전기소설 ‘을지문덕’과 ‘이순신’도 국한문 혼용판과 함께 한글판을 별도로 냈다. 한글의 강조가 민족과 나라를 살리는 첩경임을 선각자는 알았던 것이 아닌가. 세대간 계층간 언어가 분화되고 영어 실력이 지적 척도인 양 인지되는 요즘, 우리는 다시 단재 사상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말은 우리 얼의 벼리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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