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양사언의 시조
17. 양사언의 시조
  • 이동희
  • 승인 2006.05.1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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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과 부정하는 지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를 높다 하더라.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시조 전문

 

 문신으로 조선전기 4대서예가로 불릴 정도로 서예에 능했던 양사언은 업적이나 서예 작품이 후세인들에게 연대기적 기록성을 뛰어넘는 의미로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간 남긴, 3장 6구 46자에 불과한 이 한 편의 시는 두고두고 잠언(箴言)처럼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킨다.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의미 영역을 상반되는 두 가지 점에 주목한다. 하나는 이 시 화자의 소신처럼 ‘매사 성취동기를 가지고 불퇴전의 용기로 임할 때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는 인생지침이요 자기계발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표면 구조의 이면에 담겨 있을 ‘무모한 성취의욕과 물불 가리지 않는 욕망의 재생산이 가져 올 낭비적 삶에 대한 경고’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잠재능력을 계발하여 새로운 인생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는 용기는 매우 가상한 것이다. ‘하면 된다!’는 바로 이런 용기를 상찬하고 권장하는 사회적 금언으로 대접 받아왔다. 불도저같은 추진력이라든지, 저돌적(猪突的) 성품은 개발과 발전의 원동력으로 크게 대접 받아왔다. 이런 성향은 독선이나 시행착오, 낭비와 희생까지도 호도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에 담긴 지혜는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소극적이요 용기 없는 자의 처신으로 푸대접을 받아왔다. 즉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일 앞에서도 ‘하면 안 된다!’고 당당히 말 할 수 없게 하였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심정적 여유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어 왔다.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한 번 더 언행을 가늠하는 신중함마저도 무시되어 왔다.

 논리를 무시하는 맹목성이 무사다운 용기로 높이 평가받는 무인들이 한 시대를 검은 장막으로 덮었거나, 붉게 물들여 왔음을 안다. 상대적으로 논리성을 확보하려는 문인(文人)다운 사색과 사유는 우유부단(優柔不斷)함으로 매도되어 형편없이 무가치하게 평가되었다. 할 수 있으되 진정 해야 할 일인가? 오를 수 있으되 정말로 올라가야만 하는가 한 번 더 좌고우면(左顧右眄)해야 했던 인문학적 배려가 세계에 문명의 길을 내었으며, 인류사를 문화의 다양성으로 기록하게 하지 않았던가!

 태산뿐이 아니라, 하늘도 오르고 우주 공간 달나라 별나라까지 올라가는 세상이다. 오를 수 있는 대상, 마땅히 올라가고 정복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은 무한한 인간의 잠재능력 계발이라는 순기능과 닿아 있는 미덕이다. 자기연민에 빠져서 주춤거리고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인생은 두 번 오지 않는다.

 그러나 오르고 정복해야 할 것이 꼭 태산뿐일까? 오르고 극복해야 할 것이 반드시 밖에만 있는 것일까? 이 시에서 놓쳐서 안 되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오르고 주목해야 할 것은 밖에 있는 태산이 아니라, 바로 ‘사람’에 있는 것이다. 태산이 밖에 있다면 사람은 안에 있다. 이 점을 지나쳐볼 때 이 시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놓치게 될 뿐만 아니라, 무모한 만용을 지닌 무인을 양산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는 모조건 오르라는 것이 아니다. 올라가야 할 ‘사람’을 먼저 보라는 것이다. 밖에 있는 목표에만 눈이 멀지 말고, 안에 있는 자신을 바로 보라는 것이다. 긍정은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기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노자는 ‘남[밖]을 이기는 자는 힘 있는 자이나, 자기를 이기는 자는 더 강하다(勝人者有力 自勝自强)’고 했다. 그 강함이 바로 지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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