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리듬, 신명, 한국축구
20. 리듬, 신명, 한국축구
  • 이원희
  • 승인 2006.06.11 15: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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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

 성경 구절을 패러디한 이 말은 그 어느 것보다 리듬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보다 근원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태초의 ‘빛’이나 ‘말씀’도 따지고 보면 리듬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가령, 빛의 파동이나 언어의 발화(speech)는 빛과 소리의 입자가 출렁이는 높고 낮은 흐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리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빛이나 언어는 존재하기 어렵다.

 데카르트가 ‘자연의 빛’이라고 하는 ‘이성’도 리듬의식을 파악함으로써 가능하고, 억양이나 장단이 없는 언어는 소통의 어려움이 있다. 어디 빛이나 언어뿐이랴. 지구의 자전과 공전, 계절의 순환, 낮과 밤의 교차 등이 모두 리듬이다.

 생명을 존속케 하는 심장의 박동과 맥박, 피돌기 등이 리듬이요, 필리아(사랑)과 네이코스(싸움)가 번갈아 패권을 장악하는 게 우주의 원리라고 설파했던 그리스 철학자 엠페이도클레스의 논리 역시 우주의 원리를 리듬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리듬은 우주와 자연, 생명과 삶을 존재케 하는 근원적인 원리이자 이법이라 할 수 있다.

 리듬이 멈추는 순간 생명은 종결되고, 우주의 주기적인 순환 반복도 멈추게 된다. 이쯤 되면 리듬이라는 게 얼마나 값어치 있고 중요한가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리듬에 대해 무관심하다. 말의 화법, 대인관계, 옷 입는 방식, 시간의 관리 등 생활세계 전반에 걸쳐 지배하고 있는 리듬을 도무지 의식하지 않는다.

 밀고 당기고, 늦꾸고 잡아채고... 자기를 냉정하게 관리하며 삶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우주의 원리인 리듬의식에 기대어 자신을 관리하고 삶을 도모한다. ‘즐겁되 음란하지 말고, 슬프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樂而不淫 哀而不悲)’는 옛말은 삶의 일상에서 리듬감각을 유지하라는 준엄한 메시지이다.

 극단으로 치우친 정서의 리듬은 생명과 정신을 손상시켜 급기야는 온전한 삶을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리듬을 표상적 요소로 삼는 음악이 그래서 모든 예술의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다. 시나 소설 언어의 표현방식이 리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으며, 무용이나 연극이 리듬에 기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는 건축을 동결된 음악이라고 말할 정도로 응고된 건축에서도 음악의 리듬을 읽어낸다. 이처럼 리듬은 단순히 소리의 결로서 음악요소가 아니라 예술은 물론 삶 전반을 지탱하는 보편자(universal)이다.

 월드컵 계절이 왔다. 한국축구가 지난 점검 경기에서 보여줬던 몇 가지의 실망은 사실 연습이나 기량 부족이라기보다는 전략과 전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전략전술은 바로 리듬감이다.

 열심히 공을 다루어서 힘이 빠진 상태인데 다시 그 선수에게 공을 준다든지, 거리를 헤아리지 못하고 대충 띄우는 패스 연결 등에서 리듬의식의 실종을 발견할 수 있다. 손발이 착착 맞아야 신명이 나는 법이다. 손발이 맞으려면 리듬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물 흐르듯’ 공격하고 빠져 나오는 신명난 흐름을 한국축구에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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