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흠의 시
24. 신흠의 시
  • 이동희
  • 승인 2006.07.03 15: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정-문학 접점에 있는 술
 술이 몇 가지요, 청주와 탁주로다

 다 먹고 취할선정 청탁이 관계하랴

 달 밝고 풍청한 밤이어니 아니 깬들 어떠리.

 -신흠(伸欽,1566~1628)

 

 정신이나 관념상의 의식일망정 물질적인 상징을 통해야만 구체화되는 행위가 있는가 하면, 비록 물질적 존재일망정 정신으로서의 일정한 법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있기도 하다.

 앞의 예로서 제사의식 때 행하는 분향(焚香)과 강신(降神)을 들 수 있다면, 뒤의 예로서 술을 꼽을 수 있다. 천신을 부르는 분향행위는 향을 살라 그 피어오르는 연기와 퍼지는 향을 감각함으로써, 지신을 부르는 강신행위는 술을 부어 토사를 직접 적심으로써 비로소 무형의 천신이나 지신을 맞이하는 구체적인 행위다.

 이에 비해 술은 그 존재 형태가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감각행위와 닿아 있다. 천하호걸이건 도덕군자건 혹은 선남선녀이건 술은 마시면 취하며, 취하면 정신을 혼미케 하고, 마음을 흥분시키는, 즉물적으로 영향을 주는 물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술을 대할 때는 일정한 법도로서의 금도(襟度)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정신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

 일찍이 남재희 선생은「나의 문주(文酒) 40년」에서 ‘술의 지혜’를 통해서 터득한 ‘인생의 지혜’ 10개조를 남기고 있다. 음미할수록 술이 단순히 음식을 먹고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 금도로서의 일정한 법도를 유지해야 하는, 품격 있는 매체임을 실감한다.

 술을 천천히 마셔라. 낮술을 금하라. 안주를 즐겨라. 품위 있는 술집을 선택하라. 주머니 사정에 따라 술집을 골라라. 술은 벗과 더불어 즐겨라. 술은 하루 한 집에서 그쳐라. 술과 담배를 함께 하지 마라. 술은 이성과의 대화에 좋은 매체다. 한국의 술은 더 개발되어야 한다. 등 열 개 항목에 대한 주론(酒論)이 모두 만만치 않은 주력과 인생 경륜에서 터득한 지혜로 가득하다.

 술의 예찬사는 많다. 그것은 술이 문학과 밀접한 인척관계에 있음을 증명한다. 어느 시인은 ‘술은 정신과 섹스가 그렇듯 의학과 문학의 접점 속에 존재한다.’고 설파한다. 양날의 칼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잘 마시면 약이 되고, 잘 못 마시면 독이 된다는 뜻일까? 아마도 이 양자의 뜻을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작을 낳을 수만 있다면 의사의 절주 권면 따위는 아예 무시하는 것이 또한 시인묵객의 속성이다. 그런 대표적인 시인으로 우리는 이백을 떠올릴 수 있다. 그가 남긴 ‘산중대작(山中對酌)’은 술이 낳은 명시다. 兩人對酌山花開(양인대작산화개)/一盃一盃復一盃(일배일배부일배)/ 我醉欲眠君且去(아취욕면군차거)/ 明朝有意抱琴來(명조유의포금래)<둘이 마시나니 산에는 꽃이 피네/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내 취해 잠이오니 그대 그만 돌아가오/ 내일 아침 거문고 안고 다시 오시게> 주도의 구비요소가 모두 포함된 절창이다. 술이 없이 어찌 이런 명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신흠 시인 역시 이에 못지않다. ‘청탁불구, 안주불구, 원근불구, 가사불구’ 외쳐대며 주가를 순회하는 취객의 원조가 신흠시인이 아닐까? 술을 대별하면 청주와 탁주면 그만이다. 취하면 그만인 것을 청탁은 가려서 무엇하랴. 마시면 취한다는 점에서 술은 술이다.

 다만 바람 맑은 밤, 도도한 취흥을 실어 향기로운 시구라도 읊게 하는 술이라면 보나마나 청주일 것이요, 번문욕례(繁文縟禮-번거롭게 형식만 차려서 까다롭게 하는 예문)같은 술자리의 술은 맛보나마나 탁주임이 분명하다. 그나저나 정담로(鼎談路)를 오르내리며 나누는 서너 잔의 과일주는 의학과 문학의 접점이 아니라, 우정의 가슴에 담은 문학의 양식임이 분명한 술이다. 그것은 아니 술이 아니라 문학인생을 위한 정신의 양식임이 틀림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