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축제 공연리뷰> 박병도 전주대 연극영화과 교수
<소리축제 공연리뷰> 박병도 전주대 연극영화과 교수
  • 승인 2006.09.24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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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논문 ‘창극의 무대화에 관한 연구’에는 결론적으로, 선험적 연구에의 결과물로서의 창극의 방향성을 제시한 바 있다. 학문적 가치로서의 ‘판소리’가 문학자들의 다각적 논거(論據)로 이십세기 한국문학의 화두가 되어 평단(評壇)의 수면위로 부상하게 된 것이, 극장의 리프트가 현대 무대 매커니즘의 이기로 관객의 환상적 시각 위로 부상한 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일백여년의 일천한 역사를 갖는 창극은, 그 정형성의 논란으로부터 이제껏 자유롭지 못했다. 판소리가 분창형태로 발전되다가 서구식 무대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 일제 강점기 시대였으니 말이다. 용기(用器)에 의해 형태가 바뀌는 수용체처럼 무대는 참으로 많은 시대적 착오와 실험을 계속해 왔다. 따라서 동양 삼국의 대표적 전통극인 경극과 가부끼와의 경쟁 반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도 어떤 일정한 ‘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겠고, 또 그러지 못한 현실적 괴리에서 고찰해보자면 이제는 ‘형식미’의 천착에서 벗어 난 ‘내용의 내실화와 감각화’를 도모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네 ‘꾼’들은 소위 대청마루에서 십리를 내지르던 목청을 가지고 대원군이나 사대부의 초빙(?)을 받아오신 분들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볼 때, 꼭이나 우리네 ‘대청마루’를 연상하게 하는 무대의 틀(판)로서 승부를 내보는 창극이 절실히 기다려지는 것은 또 무슨 호기심일까?

 ‘전주세계소리축제’가 내 건 ‘소리’는 참으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초창기 서양음악을 앞세운 축제는 여론의 도마 위에서 허덕였고, ‘판소리’를 원용한 그-‘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바라다보니, 이제 운영진이 바뀔 때마다 제각각 ‘컨셉(concept)'이라 불리우는 그 애드벌룬에 천착하여 세계인을 놀라게 하고 있다.

 필자가 주창해 온 ‘축제가 벌려짐으로서 파생하는 새로운 그 무엇’이 다분히 한국적 소리의 가치를 담아내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관현악곡 등과 더불어 국적불명의 퓨전이 담합하고, 적당한 제의적 무희(mimic)가 가세하여 축제를 장식내지 잠식해 버리는-거액의 세비방출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번 국립창극단의 창극 ‘청’은 일천한 제작비(5천만원)의 지원으로 4천만원의 자비를 첨가해서라도 어떻하든 한국의 소리를 볼거리로 장식하려는 의지가 돋보인 작품이었다. 유영대 예술감독이나 연출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작품이라는 것은 결과론으로서, 제작진은 많은 오해와 억울함이 있기 마련이다.

 출혈을 해서라도 세 개의 대형 턴테이블을 연꽃모양으로 무대 중앙에 돌리고 싶었던 의지는 정작 무대 기술상으로 무산되고 말았고, 우리는 세계소리축제가 그들의 실험적 시연에 불과한 아픈 사연이라는 것을, 11월의 국립극장 무대에 그 한을 풀어 놓겠다는 서글픈 고백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니버시아드 발레단의 ‘심청’에서의 또 다른 환타지아가 아직도 생생한 우리에게, 무언의 발레는 ‘심청이가 사랑도 하다니!’라는 왕과의 한바탕 연정의 어우러짐에 찬사를 보냈건만, 정작 그 본디의 청이는 창극에서 만나야 제격이고, 또 창극무대는 질펀한 관중과의 동질감 형성에 상호교조작용(interact)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왕기석의 농익은 연기와, 김학용의 징그런 연기와, 유수정의 탐스런 소리와,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들은 매커니즘적 한계에 고전한 제작진의 비애를 덮어 줄 감동 그 이상의 것이었다.

 지면이 좁아 세세한 감흥을 다 열거할 수 없음이 아쉽지만, 다만 한 가지 옥에 티라면, 이제 우리의 정형성과 전형의 미를 살리려면 -세계인을 대상으로-한국의 초면(first impression)이 너무 ‘형식미’에 치우쳐 상징적 장치의 실험을 지속하지 말자는 것이다. 가부끼나 경극은 형식이나 장치의 한결같은 보전으로 세계인의 뇌리에 하나의 ‘형식’을 각인시켰고, 비록 수퍼가부끼가 실험의 선상에서 그 틀을 깨부수자 나선바 있지만, 그것은 메이저가 아닌 언더그라운드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연극적 무대언어로 식상하리만큼 전달된 바, 이제 음악적 내용이나, 그 감흥의 축적, 연기의 세련미나 악곡의 편성문제에 적극적인 시선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조심스런 조언을 해 본다.

 이제 붉은눈오목눈이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는 날아가고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둥지에 우리만의 알토란같은 새끼들을 부화시켜 오지게 키워내야 할 때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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