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조선후기의 사설시조
41. 조선후기의 사설시조
  • 이동희
  • 승인 2006.11.06 15: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락(弄樂)하는 즐거움
 창(窓) 내고쟈 창(窓)을 내고쟈 이 내 가슴에 창(窓) 내고쟈.

 고모장지 셰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져긔 수돌져긔 배목걸새 크나큰 쟝도리로 둑닥 바가 이내 가슴에 창(窓) 내고쟈.

 잇다감 하 답답? 제면 여다져 볼가 ?노라.

 -작자미상(조선후기의 사설시조)

 

 이 작품이 겉으로 들어난 제재는 ‘창(窓)’이지만, 이 제재가 함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마음속에 쌓인 비애와 고통’이다. 감성을 포착하여 이를 구체적 상관물로 표출해 내는, 기발한 착상과 신선한 재미와 함께 몇 가지 특징이 있는 작품이다.

 첫째는 생활인의 미의식이 해학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생활 언어와 창문의 종류를 장황하게 열거함으로써 답답한 심정을 절실하고도 다소 과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과장과 장황함이 바로 해학성의 본질이 아니던가.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지니고 있는 해학성은 서정적 자아의 답답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단순히 제시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답답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극복해 내려는 여유와 멋의 변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목수였거나 그의 아내였을 시적자아가 서정적 상황의 극복의지를 여유와 멋이라는 해학성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답답함과 시원함의 역전구조다. 서정적 자아의 시적 상황은 답답하고 고통스럽다. 그 원인이 듣고도 듣지 못한 채 석삼년을 지내야 하는 귀머거리 고통이건, 볼 것 보지 못하고 석삼년을 맹인 신세로 지낸 속사정이건, 할 말 하지 못하고 석삼년을 벙어리 신세로 지낸 내력이건 억울하고 답답하며 고통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답답한 속사정[사설-私說]을 토로해 내는 데는 역시 시원한 언설[사설-辭說]이 제격이다. 중장의 사설은 이런 답답함으로 통쾌함을 얻어내는 특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느려터지고 답답한 중장의 변설은 거꾸로 속사포로 토로해 내는 변설의 자유요 통쾌함이 아니겠는가! 삼 년 묵은 채증을 쏟아내는 역전의 구조! 그 어간에 해학성이 자리하고 있다.

 셋째는 맺음과 풀림의 상관성이다. 초장에서는 ‘창을 내고 싶다’를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한다. 그 목적이 종장에 와서 마무리 된다. ‘이따금 몹시 답답할 때면 여닫아 보겠다.’는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맺힌 정한을 풀어내야 한다. 답답한 속사정은 속을 보여주어야 풀리는 법이다. 볼 수 없었던 빛을 보아야, 들을 수 없었던 소리를 들어야, 할 수 없었던 말을 해야 풀리는 법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처방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답답한 속사정을 맺은 원인이 무엇인가? 바로 중장에 그 비밀이 있다. 중장은 삶을 묶어 놓은 원인이자 결과였다. 문이되 열리지 않거나 닫히지 않는 문은 이미 문이 아니다. 그런 화자에게 다양한 문이야말로 맺음의 본체요, 풀림의 해결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정한의 맺음과 풀림이라는 상반된 서정을 ‘문’으로 형상화 했다. 왜 문인가? 바로 문은 여닫는 것을 본질로 하지 않는가. ‘여닫다’는 ‘열다와 닫다’가 합성된 말이다. 우리말이 지닌 묘미-상반된 행위를 한 단어에 묶어둘 수 있는 이 절묘한 시어를 통해서 화자의 정한을 열고 닫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어간에 해학성이 자리하고 있다.

 삶을 고통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고통마저도 즐거움으로 발음할 수도 있다. 그런 삶의 통로에 문학이 있다는 것은 인생의 축복이다. 사설시조를 ‘엮음시조, 농락(弄樂), 농시조(弄時調)’라고 달리 부르는 것도 우리의 삶을 엮어서 즐거움을 누리라는 함의가 아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