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허장성세는 진실의 적이다
45. 허장성세는 진실의 적이다
  • 이동희
  • 승인 2006.12.04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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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 위희 치달아 앉아

 건넛산 바라보니 백송골(白松骨)이 떠 있거늘, 가슴이 금즉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험아래 자빠지거고

 모쳐라, 날낸 낼시망졍 에헐질 번하괘라.

 -작자·연대 미상(사설시조)

 

 이 시조는 두꺼비, 파리, 흰 송골매를 의인화하여 양반들의 약육강식(弱肉强食)과 허장성세(虛張聲勢)를 풍자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파리는 힘없고 연약한 평민을, 두꺼비는 양반 계층(지방관리)을, 백송골은 두꺼비보다 더욱 힘이 센 외세(外勢)나 중앙의 고급관리를 비유한 것으로 보면 시적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권력, 곧 타자를 지배하려는 욕망은 생명을 유지하려는 유기체의 본능적 속성이다. 문제는 이런 동물세계의 본능이 그대로 인간세계에서도 자행되고 있다고 믿거나 그 믿음을 현실화 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있다.

 『흥부전』에서 놀부는 한 줌도 안 되는 금력을 형제애와 맞바꿈으로써 천하의 불한당으로 낙인 찍히고,『춘향전』에서 변학도는 아침 이슬보다 짧은 권력의 힘으로 여색을 취하려다 불멸의 악인으로 낙점 된다. 윤흥길의 소설『완장』에서 주인공 종술은 현대판 놀부요 변학도가 되려다가 좌절한 인물이다. 다행인 것은 종술은 인간을 억압하고 옥죄는 권력-폭력으로부터의 구원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끝없이 수용하는 여성성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또 하나 다행인 것은 금력의 신기루가 무너지는 모습을 재벌들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부자 삼대 못 간다’는 속담을 현대판 부자들이 더러 그 전범을 보여지 않는가. 아침 이슬보다 짧은 권력의 속성은 ‘80년대의 역사를 정점으로 군사정권의 몰락이 여실하게 보여준다. 어찌 보면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문학적 허구를 그대로 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로 우리네 현대사는 금력의 허상과 권력의 무상함을 제대로 구현해 낸다. 현대사를 통해서 얻는 수신 덕목은 서민들이 얻을 수 있는 짭짤한 즐거움이다.

 현직 대통령의 말투가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대통령이 어느 자리인데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쥐꼬리만한 권력만 있어도 거드름을 피우는 양반 지배층의 어투를 닮지 않았다는 점만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지배층의 허장성세는 바로 자신의 무능을 감추거나 권력을 남용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어투에서는 그런 의도를 전혀 읽을 수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무소불위(無所不爲)한 인간이나 무위불능(無爲不能)한 권력은 없다. 아니 용납되지 않는다. 최대 권력자도 스스로 모자란 점을 토로할 줄 알고, 그를 선출한 국민들도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현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허장성세 거드름을 피우고 이를 지도자의 덕목쯤으로 여기는 풍토에서 진실은 더 이상 생명작용을 지속할 수 없으며, 자신의 무능을 감추고 권력 남용을 지도자의 당연한 몫으로 여기는 관리들이 행세하는 한 정의는 더 이상 꽃을 피울 수 없다.

 문명한 사회에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되 진솔함으로 이겨내려는 인격적 지도자, 자신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자인하되 널리 지혜를 모아 극복하려는 땀 흘리는 지도자를 원한다. 한 편의 옛 시조를 통해서 그런 인간성의 진화를 실감하고, 그런 역사성의 진보를 목격하는 일은 힘없는 서민들이 누릴 수 있는 짭짤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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