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타'와 '미녀는 괴로워'의 사이
'라디오 스타'와 '미녀는 괴로워'의 사이
  • 연합뉴스
  • 승인 2007.01.0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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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에 나타난 가요계 변화상에 눈길
#1. 영화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인기가수 최곤(박중훈)은 매력적인 목소리를 뽐내며 '비와 당신'을 열창한다. 그렇게 큰 인기를 얻으며 '88년 가수왕'에 오른다.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다. 어느새 최곤의 얼굴에서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고,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인기는 온데간데 없이 흩어졌다.

하지만 최곤의 '라이브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예전과 다름없는 그윽한 목소리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산전수전을 함께 겪은 매니저(안성기)는 끈끈한 정을 과시하며 그 옆자리를 지킨다. 사람 냄새가 스크린 가득 훈훈하게 퍼져간다.

#2.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가수' 한나도 가창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무대 위에는 결코 설 수 없다. 뚱뚱하고 못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 뒤 좁은 공간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무대 위의 '섹시 가수' 아미가 이에 맞춰 열심히 입을 놀린다.

물론 관객은 무대 위의 아미에게만 박수를 보낸다. 관객의 눈에는 아미가 '립싱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나는 이처럼 '얼굴 없는 가수'라 사람들로부터 심한 무시를 당한다. 따뜻한 얼굴로 대하는 듯한 음반 프로듀서 상준(주진모)도 사실은 한나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뿐이다.

최근 호평 속에 막을 내린 영화 '라디오 스타'와 현재 한창 관객몰이에 나서고 있는 '미녀는 괴로워'에서 대비되는 대중음악계의 한 단면이다.

물론 두 영화가 가요계 현실과 발자취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공연 무대까지 대신 소화하는 '미녀는 괴로워'의 한나 캐릭터는 실제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인간미가 사라져가는 가요계의 흐름만큼은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두 영화는 가요계 종사자들에게도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다.

사실 국내 가요계는 지난 10~20년 동안 그야말로 숨가쁘게 변화했다. 그동안 LP, 길거리표 무단 복제 테이프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CD와 테이프도 mp3에 주도권을 내줬다.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공연 무대도 변화의 물결을 피해갈 수 없었다. '라이브'와 '립싱크'의 차이만큼 크게 변했다.

가요 관계자들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국내에서 립싱크라는 기술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오직 라이브만 있을 뿐이었다. 립싱크는 1995년께 H.O.T, 젝스키스 등 외모와 춤을 내세운 아이돌 그룹이 대거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보편화됐다.

한 가요기획사 대표 A씨는 "당시 가요계는 경기가 무척 좋았기 때문에 외모가 된다 싶으면 가창력을 크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가수로 데뷔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면서 "이런 가수들은 무대에서 대부분 립싱크로 노래를 소화했다"고 전했다.

그룹의 경우 가창력이 떨어지는 멤버의 목소리는 코러스 등으로 숨겼다. 대신 노래 실력이 뛰어난 멤버가 고음 파트 등 노래의 대부분을 소화하기도 했다. 일부 가수들은 아예 자신의 노래 대부분을 남의 목소리로 채우기도 했다.

특히 탤런트 정양은 다른 가수의 목소리로 노래를 녹음한 후 활동하다가 들통이 난 바 있다. '미녀는 괴로워'의 한나처럼 공연까지 대신 맡는 경우는 없었지만 적어도 '부분 대리 가수'는 실제로 존재한 셈이다.

유행처럼 번지던 립싱크는 2000년께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방송사 가요프로그램에서 라이브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팬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가창력이 모자란 가수는 설 자리가 점점 없어졌다.

또 다른 가요기획사 대표 B씨는 "요즘 녹음 기술은 낮은 음정을 높이고, 잘 부른 부분만 모아 붙여 노래를 완성할 정도로 발달했다"면서 "하지만 동시에 가수의 가창력 자체도 기본적으로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노래가 거의 되지 않는 가수도 쉽게 나설 수 있었으나 요즘은 10명 가운데 8~9명 정도는 어느 정도 가창력을 갖춘 후 데뷔한다"며 "자신의 노래를 남의 목소리에 맡기는 경우도 크게 줄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두 영화는 '인간미'보다는 '상업성'이 우위를 점해가는 최근 가요계 현실도 돌이켜보게 한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는 가수와 매니저가 아직도 여전히 많지만 연예계가 전반적으로 산업화되면서 예전의 '끈끈함'이 상당히 퇴색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녀는 괴로워'의 상준처럼 한나와 아미를 하나의 '상품'으로 대하는 예가 잦아졌다.

B씨는 "예전에는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요즘은 상품성에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아졌다"면서 "돈을 좇아 의리를 버리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게 돼 씁쓸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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