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의 자리
말(言)의 자리
  • 류관현
  • 승인 2007.01.12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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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표현이지만 시간은 물처럼 흘러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실개천의 여유로움으로, 장마철 수마의 포악함으로, 거대한 폭포의 사나움으로 흘러가는 일이 대단한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쉬지 않고 막힘없이 흘러갑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뀔 때면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에 예민해 집니다.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고 새로운 시간을 대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벌써 기억 밖으로 흘러가 켜켜이 쌓여가고, 새로운 시간은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우리를 지켜봅니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과 다가 올 시간의 경계에 있는 주변인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게 우리네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줄타기는 때로는 격정적이고, 열정적이며, 짜릿하고, 괴로워하고, 통곡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좋아 신바람이 나고, 가족과 동료와 함께하는 시간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까닭 없이 허방을 디뎌 휘청거리다보면 시간은 어느덧 겨울의 막다른 골목에 우리를 몰아넣고 어딘가로 가버리는 모습입니다.

올 겨울은 눈(雪)도 많지 않고 매서운 겨울 맛도 잃은 듯합니다. 그런데 이 봄 같은 겨울에 혀가 얼었는지, 자꾸 이상한 말들이 들립니다.

요즘 세상은 말의 홍수에 빠져 삽니다. 수많은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의 발전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걸러지던 말들이 검증되지도 않고, 마치 그림을 그리려는 사람의 붓만 보고 그림이 좋으니... 어떠니... 하는 격으로 책임감 없는 말(言)이 말로 만들어져 그대로 우리들의 귀에 들어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영화제 시상식 소감으로 전 국민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었던 배우, 노인 비하 발언으로 곤혹을 치룬 정치인. 이렇듯 말 한마디로 뜨고 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번 입에서 나온 말은 형체는 없지만, 이내 사라져버리고 평생을 쫓아다닙니다. 더구나 권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말이 갖는 파장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 말이 삭제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여기저기서 많은 말들이 들려옵니다. 그 가운데는 지표로 삼고 가슴에 새길 말도 있지만, 대부분은 귀를 씻어야 할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진정이 없는 말,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 사욕을 위한 말들이 그렇습니다. 이 말은 귀감이 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대의 정신을 이끌만한 피와 살이 되는 화두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뿐인 어른들이 질시와 욕망을 위한 말만 던지기 때문입니다. 어른다운 어른이 갈망되어 지는 오늘날의 현실이 안타까워 여기에 ‘어른과 자기 몫’에 대한 글귀 하나를 적어봅니다.

사람은 자기 몫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한 섬지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하여 자기 가솔을 굶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열섬지기 짓는 사람은 이웃에 배곯는 자 있으면 거두어 먹여야 하느니라./ 백 섬지기 짓는 사람은 고을을 염려하고 그 보다 다른 또 어떤 몫이 있겠지 제대로 할라치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어른 노릇 이니라.

(최명희-혼불1- 중에서)

지금 나는 어디쯤에 있으며 그 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지, 주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몫을 해내고 있는 것인지, 나의 자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권력과 부귀영화에 눈멀고, 귀먹어 자아도취성의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내가 던지는 말이 진실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말인지, 아니면 사욕을 위해 누군가를 현혹하고 자극하는 말은 아닌지 생각하고 합시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몫을 다하고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쉽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사람 노릇하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보는 2007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주전통문화센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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