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숙여 성찰할 줄 아는 역사의식
65. 숙여 성찰할 줄 아는 역사의식
  • 이동희
  • 승인 2007.04.23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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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짝을 예는/ 바람결처럼/ 세월은 덧없어/ 가신 지 이미 천 년//

 한(恨)은 길건만/ 인생은 짧아/ 큰 슬픔도 지내다니/ 한 줌 흙이러뇨//

 잎 지고/ 비 뿌리는 저녁/ 마음 없는 산새의/ 울음만 가슴 아파.

 천고(千古)에 씻지 못할 한/ 어느 곳에 멈추신고/ 나그네 어지러운 발끝에/ 찬 이슬만 채어//

 조각구름은/ 때없이 오락가락하는데/ 옷소매 스치는/ 한 떨기 바람//

 가던 길. 멈추고 서서/ 막대 짚고/ 고요히 머리 숙이다.

 김해강(1903~87)「가던 길 멈추고-마의태자 묘를 지나며」전문

 

 경상도 합천군에 ‘일해공원’이 세워져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일해’가 누구인가? 저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의 주역으로 우리 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장본인이 아닌가? 그런 인물을 자기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한때 무력으로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앉았다는 이름으로 그를 기리려는 행태는 역사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극치를 보여주는 망발이 아닐 수 없다.

 자랑스러운 위인, 위업을 남긴 민족의 영웅,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나라의 운명을 온몸으로 짊어진 채 산화한 열사, 겨레의 아픔을 대신하여 천형의 길을 걸은 지사,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용사들의 이름마저도 함부로 새기고 세우는 데 조심하고 삼가며 신중에 신중을 다하는 것이 그분들의 이름을 깨끗이 유지하는 최선의 도리가 아니던가?

 하물며 역사의 평가가 진행 중인 인물을, 아니 나라와 겨레의 자취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독재자를 역사의 행간에 굵직하게 새겨 두고 기리려는 발상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아무리 정치적인 이해득실이 상반되는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로 인한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는 꼼수를 노린다 할지라도 최소한의 금도(襟度)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 최소한의 금도가 바로 진실 앞에 머리 숙일 줄 아는 역사의식이다.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는 민족은 역사적 치욕을 되풀이한다’는 금언은 역사학의 지워지지 않는 명언이다. 어느 공동체가 되었건 지나간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역사가 일깨우는 진실의 힘을 외면할 때 치욕의 역사는 가혹하게 되풀이되어 나라와 민족을 멸망시키고야 만다.

 우리는 역사의 길을 가면서 때때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역사의 가르침을 지팡이 삼아, 고요히 머리 숙여 진실 앞에 겸손했던가? 당장의 이익에 앞서 먼 미래에도 진실할 것인가? 그로 인한 이득이 반목과 파당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 냉철하게 묻고 성찰해야 한다. 그래도 역사의 엄정한 심판 앞에서 자유로울 자 많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망국의 치욕 앞에서 보인 마의태자의 결단은 의연했다. 신라 56대 경순왕의 태자. 신라가 고려 태조 왕건의 신흥세력에 대항 할 길이 없어 항복을 논의하자 이를 반대했다.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전달되자 태자는 통곡하며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시를 대하면서 시의 행간에 숨은 시적대상에 의미의 중심축을 두기 쉽다. 역사적 기록과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서사적 맥락과 전설이 가미된 설화적 흥미까지 더하여 독자를 사로잡는다. 부제 ‘마의태자 묘를 지나며’는 이런 감상에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참으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가던 길 멈추고’에 함축되어 있다. 화자의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화자의 목소리로 진실을 말할 줄 아는 슬기가 필요하다. 천년 사직도 지나고 나면 바람결에 불과하다. 만년의 한도 지나고 나면 한 줌 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가던 길 멈추고, 역사의 길목에서 어느 길이 진실한 길인가? 냉철하게 성찰할 줄 아는 역사의식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현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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