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비보이춤, 육체성의 발화
60. 비보이춤, 육체성의 발화
  • 이원희
  • 승인 2007.05.25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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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녹아버린다. 탄탄한 성채인 양 좀처럼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고급문학이 대중문화로 이동된 지는 하마 옛적이 되었고, 발레 토슈즈를 벗어던진 이사도라 덩컨의 맨발 발레가 이제는 운동화를 신고서 대중친화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오페라에 팝을 얹혀 팝페라가 등장하고, 얼터내티브 음악에, 정갈하게 만들어진 데코럼보다는 파괴적이고 얼크러진 춤에서 우리는 짜릿한 쾌감을 경험한다. 진정 우리시대 문화는 저항과 전복을 꿈꾸는 불온한 얼굴인가? 

  요새 비보이춤이 모든 문화판에 단골로 등장하면서 상한가를 올리고 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축제는 물론 TV 쇼나 뮤직 비디오에서부터 대학 홍보에 이르기까지 비보이춤은 ‘잔다르크’가 되어 젊은 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는 으레 레코더 박스를 든 채 비보이춤을 추기 일쑤이고 학교 교정에서도 중·고등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추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헐렁한 바지에 속살을 훤히 드러내면서 때로는 개별적으로 때로는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내는 한 판의 비보이춤. 젊은이들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이 춤은 놀이로부터 출발해서 이제 월드와이드문화가 되었다. 

  원래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남자’라는 의미인 B-Boy. 이 춤은 역동적이고 발랄해서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회전동작, 헤드스핀, 윈드밀, 에어트랙 등 파워 무브가 뿜어내는 짜릿한 역동성은 묘기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어찌 보면, 우리 전래의 살판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관객들에게 흥을 돋게 하기 위해 추임새를 한다는 점에서는 판소리를 닮기도 했다. 목청이 아닌, 몸으로 풀어내는 판소리. 그러고 보니, 천둥 뇌성이 치는 듯한 춤의 격렬함은 수리성을 닮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스타일 무브는 계면조의 몸적 표현이랄 수 있다. 어찌되었든 강약의 리듬을 조절해가면서 관객과 한몸으로 어울릴 수 있다는 점에서 비보이춤은 우리 재래의 전통연희와 멀지 않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비보이춤은 굳이 무대랄 것도 없이 삶 속에서 자란다. 내가 있고 우리가 있는 판만 존재한다면 그리고 구경꾼이 모여들어 보아주고 함께 흥성거릴 수만 있다면. 삶의 뭉클뭉클한 감정들을 몸이나 말로 풀어내는 살판이나 판소리와 같이 구획된 무대를 거부한다.

   이 춤은 흑인들의 힙합에서 유래된 저항의 몸짓이었다. 변두리로 밀려난 흑인들의 인권과 슬픈 역사를 몸으로 풀어내는 정치적 포퍼먼스. 비보이춤의 이런 정치성은 이제 그 의미가 탈각되고 문화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듯하다. ‘나’를 받아서 ‘너’가 잇고 ‘우리’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춤의 패턴에서 ‘나’와 ‘우리’의 소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 집단의 논리가 근대의 개인의 논리로 이어지면서 인류 역사의 시선은 자리바꿈을 한다. 중세와 근대가 ‘집단’과 ‘나’의 대립이라면, 현대는 이 둘을 조우시켜 소통의 아름다움을 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비보이춤을 통해서 만날 수 있음이 반갑다. 얼마 있으면 서울 잠실벌에서 세계 비보이대회가 열린다. 기왕 우리나라 비보이춤 실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으니 기량보다는 ‘형이상학 뼈대’가 굵직하게 드러나는 춤판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나’와 ‘우리’ 모두 소통하는 월드와이드문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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