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 가필드’
‘아브람 가필드’
  • 김인수
  • 승인 2007.06.07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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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나라의 통치자중에 수학자를 지칭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기하학에 조예가 깊어 도형의 정리를 만든 일 이 있지만, 근세에 국가의 통치자들 중에 수학에 관심을 가진 정치가는 아주 희귀하다. 그런데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 진기록을 남긴 대통령은 아마도 1881년 3월 4일 취임한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아브람 가필드(J. A. Garfield 1831-1881)일 것이다. 그는 두 손을 가지고 한손으로는 그리스어를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라틴어를 능숙하게 쓸 수 있었고, 또한 대통령으로서 다른 사랑이 전혀 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실제로 피타고라스의 증명방법은 수백 가지 이상이 된다고 하며 중국의 수학자과 바빌로니아의 수학자들은 이미 피타고라스보다 수백 년 전에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증명 중에 하나는 ‘서안도’로 알려진 고대 중국의 그림에 나와 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가필드 대통령의 증명은 그를 위대한 수학자의 반열에 오려 놓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아주 흥미 있는 일이고 아주 감명적인 일이다. 그의 증명 방법은 사다리꼴의 넓이가 윗변과 아랫변 길이의 합에 높이를 곱한 값을 반으로 나눈 것이라는데 착안하여 정리를 증명했다.

 밑변을 a 윗변을 b라하고 높이를 a+b되게 하여 한 변이 직각인 사다리꼴의 면적 넓이를 구하면 ‘1/2(a+b)(a+b) = 1/2(ab) + 1/2(ab) + 1/2(c*c)’ 가 되어 양변을 정리하면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된다. 그의 증명은 1876년 4월 1일자 뉴잉글랜드 교육 논문집에 게재되었다.

 1833년 가필드는 아버지가 죽자 가필드의 가족은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소규모 농장을 계속 운영하면서 자녀들을 인근 학교에 보냈다. 가필드는 오하이오 주 하이럼에 있는 서부예비교양학교를 거쳐 윌리엄스대학을 다녔다. 1856년 졸업 후에는 오하이오의 모교로 돌아와 교사가 되었고 뒤에 교장직을 맡았다. 토지공유원칙의 옹호자였던 그는 새로이 구성된 공화당을 지지했으며 1859년에는 오하이오 주 의회에 진출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제42오하이오 의용보병연대를 조직하여 샤일로 전투에 참가했고 컴벌랜드군(軍) 참모장으로서 치카모가 전투를 지휘한 뒤 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가필드는 1862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880년까지 재임했다. 하원세출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고율의 보호관세를 지지하고 급진적인 남부재건정책을 추진하는 등 재정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880년 오하이오 주의회는 가필드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가필드는 11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5만 표를 밑도는 극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881년 7월 2일 대통령이 된 지 4개월이 갓 지났을 때, 가필드는 워싱턴 D. C.의 한 기차역에서 돈으로 공직을 사려다 좌절당한 찰스 J. 기토의 총에 맞았다. 의사들이 가필드의 등에 박힌 총알의 위치를 찾지 못하여 수술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전화기를 발명한 알랙산더 그래함 벨은 전기 장치를 이용해 총알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는 현대적인 X-선 장비와 항생제가 없었기 때문에 가필드 대통령은 가엾게도 감염으로 인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후 6개월 15일 만인 1881년 9월 19일 사망했다.

 그는 그동안의 대통령으로서 유일한 직무수행은 범인인도조약에 서명한 일 한가지이었다. 이러한 경우 부통령이 대통령의 권한과 임무를 대신한다는 데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으나 회복 할 때까지 권한대행으로 있어야 할지 아니면 대통령이 되어야 할지가 문제였다. 헌법규정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의견이 분분했던 와중에서도 회기 중에 있지 않은 의회가 이를 논의할 수는 없었다. 1881년 9월 9일 국무회의는 이 문제를 협의하여 일단 가필드 대통령과의 상의를 거쳐 문제를 매듭짓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의사들은 난색을 표명했으며 9월 19일 그가 죽을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수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가필드 대통령이 만일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만 있었더라면 아마도 수학자들을 위한 획기적인 일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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