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사유와 향유
64. 사유와 향유
  • 이원희
  • 승인 2007.06.29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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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적으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즐기기 위해서 산다. 아니다. 생각이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가 시소처럼 높이 솟아 있는 게 저간의 인류문명사이다. 이른바 사유와 향유, 이 두 가지 방식은 서구철학의 근간이다.

 즐기는 삶은 인간에 내재된 유희적 본성 즉 놀이 본능에서 출발한다.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학습들도 따지고 보면 놀이적 충동에서 시작된다. 삶 그 자체가 유일한 것이며 단 한 번이기에 인생은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기며 살아야 한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그리고 계속 노세’ 줄창나게 불러대는 카르페 디엠의 외침. 이 향유의 논리는 오늘날 만연되어 있는 축제에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에 사유의 논리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 자체가 앎의 출발이자 철학의 시작이다.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설파한 소크라테스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사유를 중심에 놓은 철학자이다. 그래서 사유로 세상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을 ‘소크라테스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유명한 데카르트에 이르러 사유와 이성은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근대 계몽을 열어 눈부신 과학문명이 손과 발 그리고 머리를 대신하면서 신체를 죽이고 말았다. 대학에서 문사철, 인문학은 설 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이 분야 전공자들은 새로운 곳에 천막을 치고 화전민 학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삶의 중심축이 이성적 사유에서 발랄한 감성으로 이사간 현시대. 지금은 이성과 사유를 정복한 전복의 시대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축제의 난장으로 내려온 향유의 몸들은 여기저기서 꿈틀꿈틀 전복의 환희에 도취되어 카니발을 연다.

 그러나 정작 카니발 정신이 실종된 카니발, 이것이 오늘날 예제없이 터지는 온갖 축제의 모습이다. 일상의 전복, 주변부로 밀려난 자들의 중심부 진입, 억압과 굴종을 뒤집는 역설의 파노라마가 축제이고 보면, 오늘날 축제는 제대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축제가 태생적으로 지닌 향유의 정신은 고스란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자본의 논리만 펄럭인다. 지방자치단체와 축제의 주체자들로부터 축제에 참여하는 각종 음식과 상품, 위락시설 제공자에 이르기까지 축제를 한껀 땡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다. 축제가 사라진 축제, 이것이 향유의 절정에서 사유의 꽃을 피워야 할 이유이다.

 축제가 애초에 전복과 향유의 논리에서 시작되었다면 이는 생활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다. 축제는 한마디로 대동사회를 꿈꾸는 욕망의 표출이다. 단오를 맞이해서 전국적으로 축제가, 꽃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일종의 계절축제이다. 그러나 계절은 온데간데 없고 대동사회의 욕망도 자취를 감추었다. 참을 수 없는 사유의 가벼움으로 걸어와 지금 ‘축제’를 멀리 던져놓고 축제판을 연다. 유월이다. 뻐꾸기와 종달새가 서로 소리를 섞고 존재를 섞는 유월이다. 이 무더위에 저들은 존재의 교환으로 자연을 만들어 나간다.

 <극작가/한국싸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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