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김기림 '바다와 나비'
74. 김기림 '바다와 나비'
  • 이동희
  • 승인 2007.07.02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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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실패한 것이 낫다
 아모도 그에게 수심을 알려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레 저려서

 공주처럼 지쳐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1908~?)「바다와 나비」전문

 

 안전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도전은 무모한 만용일 뿐이다. 그러나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사람에게 안전은 죽음과 다름없는 의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신세계를 창조하려는 모험과 도전 정신을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패러다임이 아니다. 무위(無爲)를 인간의 작위적 행위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자연법칙에 따르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본다면, 모험정신이야말로 의식을 초월한 고차적인 자연행위요, 완성적 행위이다. 도전과 모험은 자아실현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차분한 시적어조로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그 좌절’이라는 주제를 미학적으로 전달한다. 시인의 초기 시에서 자주 보였던 딱딱하고 낯선 외래어 대신, '바다 · 청무우밭 · 초생달'이 드러내는 푸른색 이미지와 한 마리 '흰 나비'로 표출한 이미지가 선명한 색감으로 대비되어, 모더니즘 특유의 시의 회화성을 잘 보여 준다. 이런 이미지는 근대의 문명 앞에 화자가 꿈꾸었던 바가 좌절됨으로써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여, 근대 모더니트스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이런 회화적 미덕은 의미 영역에까지 파급되어 독자들의 미의식을 충만케 한다. (도무지 알 길 없는)수심 깊은 바다, (아직도 차갑고 거칠기만 한)삼월 바다로 형상화 된 세상을 향해서, 시적 대상-어린 날개를 지닌 흰 나비, (온실의 화초처럼 고귀하고 연약하기만 한)공주는 무모하게 날아들어, 새파란 초승달처럼 시리고 호된 시련을 겪는다.

 ‘바다의 무서움을 모르는 나비’처럼 순수한 도전은 가상하다. 거대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헤아릴 길 없는 세파의 위협 앞에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세 살 아기의 모험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지녀야 할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 도전이 비록 죽음에 이르는 길일지라도, 호랑이 앞에 아장아장 기어가는 인간의 도전을 어찌 무모하다고만 할 수 있으랴. 절제되고 냉철하기까지 한 화자의 시선을 통해서, 근대 모더니스트의 안목을 읽는다.

 현실은 가혹하다. 비록 고귀한 출신성분을 지녔을지라도, 사람은 보다 큰 세상을 향하여 나서야 한다. 허물을 벗고, 날개를 달고, 다시 알을 낳고, 무명의 어둠으로 회귀할지라도, 우화등선(羽化登仙)하려면 반드시 가혹한 현실, 자연의 위험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야 한다.

 휴식처는 어디에도 있고, 쉴 곳은 어디에도 없다. 나그네는 발길 닿는 곳이 쉴 곳이고, 걷는 길이 안식처다. 쉬고자 할 때 가야할 길은 앞에 있고, 가고자 할 때 육신은 파김치가 되어 있다. 고단한 인생은 삼월바다도 청무우밭으로 보이고, 지친 나그네에겐 파란 초승달도 마냥 서글픈 동행이 된다. 그래도 나비는 날아야 하고, 그래도 나그네는 걸어야 한다.

 참 아름다움과 영원한 안식처는 먼 데 있는 오아시스가 아니라, 부딪치며 깨어져야 할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실패해도 도전하고 모험하는 삶이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가 지녀야 할 ‘때 묻지 않은 패배’는 참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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