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19년에 17세의 나이로 생원에 합격하고, 선조 2년 22세에 문과에 합격해 승무원이 되고, 선조 24년에 형조참판을 거쳐서 대사헌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선조 25년 임진왜란 중에는 이조판서겸 평안도 도 순찰사가 되고, 선조 27년에 우의정과 사도 체찰사가 되어 문관과 무관을 겸한 중책을 맡아 그 사명을 다하였다.
이원익은 키가 세자 세치(약 1m)밖에 안돼 젊었을 때 바닥 높이가 1치(3cm)쯤 되는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하루는 나막신을 신고 관상을 보았더니 관상쟁이가 그를 아래 위로 한번 훑어 보더니 하는 말이 “당신의 키가 한치만 더 작았더라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인물이 될 관상인데….” 하면서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원익이 신고 있던 한치 높의의 나막신을 벗어 버렸더니 관상쟁이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재상이 될 어른을 이렇게 만나뵙게 되오니 황공 하옵니다.”고 아뢰었다. 과연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등 3대에 걸쳐 유명한 재상이 되었다.
그가 현관이 되기 전에 집을 지으려고 재목을 사두었는데 갑자기 호조판서가 되는 바람에 세상의 의심을 사기 두렵다고 집 짓는 것을 단념하였다. 공직에서 물러났을때는 이미 재목이 다 썩어 있었다. 이원익은 한평생 초가집에서 끼니를 걱정하며 살다가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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