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통해 본 가족 - 신화와 현실
드라마를 통해 본 가족 - 신화와 현실
  • 김흥주
  • 승인 2007.07.1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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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끝난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만들어 낸 가족이 세간의 화제다. 흔히 드라마가 보여주고자 하는 가족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대국민 계몽 차원에서 가장 이상적인 가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가족 해체의 시대에 3대가 같이 모여 서로 도와가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소위 전통가족을 보여 줌으로써 도덕적 각성을 꾀하고자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는 가족현상을 포착하여 작가적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가족이다. 통념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러나 현실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가족상이다.

‘하이킥’에서 보여준 가족은 매우 새롭다. 우선 역할 측면에서 근엄한 가장을 야한 동영상이나 숨어서 보는 주책덩어리인 할아버지로, 두 아들을 둔 40대 가장을 술 먹으면 돌변하는 괴물로, 능력 있는 그 아내는 마음대로 괴물을 부리는 사육사로 돌변시킨다.

관계 측면에서는 파괴의 즐거움까지 있다. 먼저 부부관계는 근대의 황금분할이라 할 수 있는 성별 역할분업을 파괴한다. 한의사로서 능력 있는 아내는 생계유지자로서 바깥일을 하며, 명퇴자인 남편은 이런 아내를 외조하려 최선을 다한다. 놀라운 일은 권위를 상실한 남편이 분노하지도 않으며, 아내 또한 경제력을 앞세워 군림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위험하지만, 스스로는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아무 불편함 없이 살아간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또한 수직적 종속이라는 기존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여기에서의 고부관계는 “구박은 무슨... 며느리 눈치 보느라 못 살겠다”는 요즘 시어머니들의 푸념을 대변하는 듯하다. 언제나 합리적이며, 똑 부러진 며느리 앞에서 과거의 시어머니 권위는 상실된 지 오래다. 오히려 서로를 인정하는 수평적 의존관계 속에서 평안함을 추구하려 한다.

친구처럼 지내는 이혼 부부도 통념상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가족관계다. ‘하이킥’이 보여준 젊은 부부의 이혼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에서 시작되며, 이혼 이후에도 아이 양육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까지 서로 상의하고 협조한다. 나아가 이혼한 며느리를 대하는 시부모도 그다지 감정적이지 않다. 심지어 이혼하면서 남겨진 손자를 돌보기 위해 이혼한 며느리와 수시로 통화하고 만나기까지 한다. 현실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하이킥’은 드라마다. 그것도 시트콤 형식이기 때문에 풍자성이 강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여준 다양한 가족관계와 역할의 재구성은 단순히 드라마적 ‘허구’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여운이 남는다.

최근 들어 심각해지고 있는 가족문제를 논의할 때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여성 책임론이다. 여성의 높은 교육수준과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여성의 경제력이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성별 역할분업이 붕괴되고, 이로 인해 남성ㆍ남편ㆍ아버지의 권위가 상실되는 과정에서 가족의 균열이 생겨나며, 이것이 가족문제로 표출된다는 진단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하이킥의 능력 있는 아내와 며느리는 가족문제를 야기하는 ‘공공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 가? 여성의 경제력은 가족생존의 기반이 되며, 여성의 합리적인 선택과 남성의 이에 대한 자발적 동조가 새로운 가족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 협력하여 새로운 역할구조를 만들어내는 모습, 능력 있는 아내를 위해 기꺼이 주부(主夫; house-husband) 역할을 자청하는 남편의 모습, 이혼은 하지만 언제나 친구처럼 내는 이혼부부의 모습 등은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가족들을 모두 비정상이자 문제가족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여성의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족으로서 그들에게는 최선이자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다.

‘하이킥’에서 보여준 가족상은 정상가족의 신화에 얽매여 있는 기존의 기득권층에게는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 합리적으로 선택해서 만들어가는 인위적인 구성물이다. 따라서 가족은 언제나 변할 수 있다. 아니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렇게 등장한 새로운 가족에 대해 “어떤 가족이 옳고 그르다”는 가치가 개입될 수는 없다. 우리 가족이 소중하듯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가족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원광대 복지보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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