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부안은 고려청자의 중심 - (3회)현해탄을 건너간 부안청자
<2부>부안은 고려청자의 중심 - (3회)현해탄을 건너간 부안청자
  • <일본 오끼나와=기획취재팀>
  • 승인 2007.10.0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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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들은 이웃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간다. 도자기 문화도 중국에서 자기가 탄생한 이후 주변국으로 확산되는데, 고려가 가장 먼저 이를 받아들여 생산하고 독자적인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도자기 생산을 오랫동안 갈망해 왔지만 한참 후인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 도공의 힘을 빌리면서 도자기 생산국 대열에 편입된다.
자기 생산 이전은 중국과 한국에서 수입한 청자 등으로 상류층의 욕구 충족를 대신하였다. 특히 12세기 이후 해양을 통한 교류는 도자기의 길이라 명명될 정도로 세계 교역의 중심에 도자기가 자리잡고 있는데, 일본 역시 이 시기에 많은 도자기의 유입이 있었으며 고려청자도 수량의 차이는 있지만 이 시기 이후 북해도(北海道)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 확산된다.

# 일본 도자문화의 영향을 미친 부안의 고려청자

고려와 일본과의 교역은 다자이후(大宰府)를 통한 제한적인 공무역이 중심을 이루어 중국 도자에 고려청자의 비율은 매우 한정적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출토되는 고려청자는 수량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정치, 경제, 문화와 대외 교역의 핵심지역인 쿄토(京都)와 하카타(博多), 카마쿠라(鎌倉) 지역 등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어 고려청자가 일본 도자문화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쿄토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수도로 일반지역에 비해 많은 고려청자가 출토되고 있으나 하카타와 카마쿠라에 비하면 많은 수량은 아니다.
한성욱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은 “쿄토가 수도로서 대외교류가 많았음을 생각한다면 고려시대 전기간 동안 유입된 수량이 많지 않아 고려 청자의 소비에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며 “이는 9세기대 신라의 큐슈(九州)지역 침략에 대한 반감으로 이후 한반도에 대해 적대적이며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했던 쿄토 귀족층들의 고려청자에 대한 선호도가 낮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초기청자부터 후기청자까지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초기보다 중기 청자 이후가 많으며, 순청자에 비해 상감청자의 비율이 많은 것이 특징.
김종운 부안군 문화재 전문위원은 “순청자의 경우, 굽이 없으면 중국 청자와 쉽게 구분되지 않아 그 수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며 “그러나 이 중 부안 유천리의 대표적 생산품인 상감청자는 독특한 문양기법으로 중국청자와 쉽게 구분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중기 이후의 고려청자가 많이 확인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상황으로는 고려중기 이후 유천리 청자를 비롯한 상감청자의 수량이 많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이전에 비해 고려청자가 활발하게 유입되었음을 알려준다”고 덧붙였다.

# 일본 대외교류의 창구 하카타와 고려청자

하카타는 일본 대외교류의 창구역할을 담당했던 지역으로 다종 다양한 외래문물이 유입된 곳이다. 고려청자 역시 초기부터 말기청자까지 다양한 청자가 유입되면서 하카타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고려청자 수량이 확인된 곳이다.
한성욱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대외 교류의 창구로 고려와의 잦은 사신 왕래와 한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요인 등이 있으나, 무엇보다 다른 지역에 비해 하카타 사람들이 고려 청자를 좋아 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하카타의 시기별 고려 청자의 유입 과정을 살펴보면, 전기인 11세기대부터 12세기 전반은 다자이후와 하카타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으며 중기는 12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전반으로 일정한 양의 고려청자가 출토되고 있으나 전기에 비해 그 수량이 매우 적다.
한성욱 위원은 “이 시기는 카마쿠라 막부가 다자이후로부터 큐슈지배와 무역관리 권한을 접수하여 직접 이 지역을 관할하였기 때문”이라며 “고려청자를 선호했던 막부에서 외교적 선물과 교역품을 직접 관리하면서 고려청자를 카마쿠라로 이송한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후기는 14세기 후반부터로 유적과 유물 모두 매우 급증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중국 도자가 감소하면서 상대적으로 고려청자가 증가하여 점유율도 20∼30%에 이르고 이러한 현상은 카마쿠라 시대에 매우 소량 유입되었던 것에 비하면 특징적 현상. 이처럼 후기에 많은 청자가 유입되는 배경은 135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왜구의 한반도 등장시기와 일치하고 있으며 이 시기는 원(元)과 명(明)이 교체되는 혼란의 시기로 왜구로 인해 중국과의 무역이 제한 되면서 고려에서의 도자 유입이 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였다.
한 위원은 “왜구의 금지와 소탕을 요청하기 위한 고려 사신과 고려 포로들을 송환하기 위한 일본 사절 등의 왕래에 의해 다양한 외교적 선물이 유입되면서 고려청자도 함께 유입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며 “이 시기의 고려청자는 대부분이 상감청자로 하카타 출토 고려청자의 특징은 고려후기 상감청자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 부안 상감청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일본

카마쿠라는 카마쿠라 막부의 핵심지역으로 카마쿠라 시기에 한정하여 집중적으로 고려청자가 유입되는데, 이는 그들만의 독창적 문화를 구축하고자 노력하였던 카마쿠라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에 의한 결과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13세기는 원(元)의 일본 원정에 대한 야욕으로 대립과 반목의 시기였으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신 방문으로 고려청자가 카마쿠라 막부에 유입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카마쿠라 막부는 다자이후로부터 큐슈지배와 무역관리 권한을 접수하여 적극적으로 대외교류를 실시하여 많은 외래문물이 수입되었는데 고려청자도 이 중 하나. 이때의 대외교역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무역선이 바로 전라남도 신안에서 인양된 ‘신안선’이다.
일본의 고려청자 출토지를 대표하는 이들 지역에서 출토되는 고려청자의 그릇 종류는 쿄토와 카마쿠라의 경우 대부분 질이 좋은 양질의 병과 호 등 장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특수 기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하카타는 일상생활 용기인 완과 접시가 출토품의 절대량을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쿄토와 하카타는 조질청자와 철화청자가 출토되고 있는데, 조질청자는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은 양상으로 고려청자가 장기간 유입된 쿄토와 하카타만의 특징.
한성욱 위원은 “카마쿠라에서 출토되는 고려청자는 13세기대의 순청자와 상감청자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부안청자가 가장 왕성하게 운영되었던 시기와 일치한다”며 “따라서 카마쿠라 사람들의 고려청자에 대한 열망은 부안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라고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 일본 귀족층이 애장한 부안 상감청자

일본 카마쿠라에서는 발견된 주전자에는 부안 유천리에서 확인되는 상감포도동자문이 여러점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하국과 일본에서도 출토예가 매우 희소한 유물로 카마쿠라에서의 출토의미가 검토되어야 할 부분.
한성욱 위원은 “이처럼 특징적인 무늬가 확인되는 것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던 카마쿠라 무사 계층의 취향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는데, 고려청자 즉 부안청자에 대한 특별한 선호도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고려청자의 무늬는 쿄토와 하카타의 경우 다양 하지만 특징적인 문양은 확인되지 않지만 카마쿠라는 그릇 종류에 따라 특정 문양이 중심을 이룬다. 순청자 매병은 ‘음각연화문’을 선호하였으며 상감청자 매병은 ‘운학문’ 유형을 중심으로 ‘포도동자문’이 일부 유입되었다.
그리고 하카타와 카마쿠라에서 출토되는 고려청자는 생산시기와 폐기시기가 대부분 비슷한데, 쿄토 출토품은 생산시기보다 늦은 시기의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어 특징적이다. 이는 소량 유입된 고려청자를 오랫동안 사용한 후 폐기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쿄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고려청자를 선호하지 않았으나, 고려청자를 선호한 소수 귀족층이 잘 관리하여 오랜 기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성욱 위원은 “고려청자는 중국청자에 비해 양은 많지 않으나 오랫 동안 일본의 도자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유천리 청자도 그들의 미의식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며 “중국 자기를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한 일본의 자기 생산에 대한 욕구는 조선 도공의 힘을 빌려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문명의 교류는 모방성과 함께 이를 독자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면서 발전하는데 일본은 이런 모방과 변천을 거듭한 결과 현재 세계적인 도자 강국이 되어 있다”며 “우리도 과거의 화려함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풍요로운 도자문화를 개척하는데도 힘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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