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아 누나
순아 누나
  •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 승인 2024.03.2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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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순아 누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을 찾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누나, 왜 제게 존대하세요?” 애통리 할머니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순아 누나는 친 누나같은 존재였다.

식모, 그때는 가난한 집 딸은 어린 시절 그렇게 보내졌다. 그렇게 입이라도 하나 덜어내야 했다.

막걸리 배달을 하시던 아저씨가 먹던 고봉밥의 강렬한 기억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큰 밥그릇에 담긴 밥의 거의 절반이 봉분으로 솟아올라있었지만 아저씨는 그것을 먹고도 허기진 모습이었다.

국민학교 실과 수업시간엔 친구들과 함께 리어커에 낫을 싣고 풀을 베러 나갔다.

농번기 모내기와 벼베기, 그리고 여름방학 숙제 중 하나였던 잔디씨 모으기와 겨울철 교실난로에 쓸 솔방울 줍기도 그 시절 학교생활의 일환이었다. 쌀을 아껴야한다고 혼·분식을 장려했고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하다.’며 아이 많은 부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너무도 많은 채널의 홍수 속에 한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기 힘든 오늘이지만, 그 시절 단 2개의 채널이 전부인 흑백 TV에서 방영하던 <타잔>은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그것을 보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렸지만 타잔을 온전히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전기가 끊겼기 때문이다.

오늘 이런 상황을 접한다면 인권유린과 아동학대 그리고 저출생을 초래한 근본악이라 얘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 자기의 모습에 모든 것을 투영하기 쉽다.

카(E. H. Carr)가 얘기한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누군가 얘기한다.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오랫동안 일본 문화 수입을 막았단 말인가? 참으로 한심하다.’

해방 직후 조선인에게 일본어와 일본문화는 오늘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상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었다. 그 시절 국민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에게 국어는 일본어를 의미했다. 만일 일본이 50년만 더 조선을 지배했다면 조선어의 운명은 게일어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영국에 대한 민족감정이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느끼는 것 이상인 아일랜드인들이 왜 지금 영어를 쓰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일이다. 일본 지배의 그림자가 사회 모든 영역에 아직도 짙게 남은 상황에서 정부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해방부터 김대중 정부 전까지 일본문화 수입을 막았던 것은 국가 독립과 민족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한시적이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K팝을 필두로 세계적인 문화강국으로 떠오른 오늘 한국 모습을 보면서 그 시대의 문화정책을 얘기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약자에게 민족주의는 선(善)이다.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시절의 민족주의와 세계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역량을 갖춘 오늘 대한민국의 민족주의가 같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여전히 개념 정립조차 완전하지 않다. 이성(理性)은 감성(感性) 너머에 존재한다. 라떼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 필독서였다. 이제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순아 누나의 남겨진 외아들은 잘 성장했다.

장상록 <완주군농업기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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