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사용이 많이 줄었지만 부모님이나 친지분이 주신 용돈을 빨간 돼지 저금통에 넣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진 이가 많을 거다. 여러 동물 중에서 소나 개, 닭도 아니고 돼지가 저금통의 모형으로 자리를 잡은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처럼 화폐의 거래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 재화는 곧 돈이었고 돼지는 다산(多産)을 하는 동물로 예부터 부(富)를 만드는 가축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저금통은 돼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 졌다.
부(富)를 상징하는 돼지의 기운을 받아 재화가 풍성해지는 부를 이루기 위해 만들어 마시던 술이 있었다. 바로 삼해주(三亥酒)다. 간지를 사용하던 시절 돼지를 상징하는 해일에 빚은 술을 지칭하는 것으로 설 이후 새해에 찾아오는 첫 해(亥)일에 시작하여 세 번의 해일에 빚었다고 해서 삼해주다. 첫 해일에 밑술을 시작한 이후 두 번의 덧술을 하는 방식인데 12일마다 돌아오는 해일에 빚는 경우가 있었고 새해 첫 해일이후 찾아오는 새로운 달의 첫 해일마다 덧술을 하여 만들어지는 삼해주도 있다. 이런 이유로 삼해주는 짧게는 36일에서 길게는 100일에 가까운 장기간 발효를 하여 만들어지는 술이다. 발효가 끝난 후에 술을 걸러 탁주상태로 마신 것이 아닌 술항아리에 용수를 넣거나 장기간의 침지를 거쳐 맑은 청주로 마셨던 술이다.
삼해주는 이처럼 집안과 지역마다 만드는 방식이 차이가 있었다. 이는 재료에서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삼해주는 왕실에서 주로 사용되다보니 당시 부(富)의 상징인 찹쌀을 사용해서 빚어졌다고 전해진다. 이후 멥쌀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유교를 국교로 하면서 농업이 발달했던 조선에 이르러 삼해주를 만드는 재료는 찹쌀이 주를 이루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해주는 조선에서 기록된 고문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술로 당시에는 가장 인기가 높았던 술이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고문헌대로 삼해주를 빚어보면 겨울에 빚는 술답게 맛이 좋다. 그래서 술 맛이 좋았기에 삼해주가 인기 있었다고도 말하지만 일부에서는 시대를 관통하는 욕망 중에 가장 컸던 부(富)에 대한 갈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돈을 좋아하면 주위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던 시대였다. 재화를 멀리하는 것이 덕을 갖추었다고 평가받는 특성을 가졌던 시대였기에 사대부와 선비는 대놓고 돈을 추구하지는 못하던 때다. 그래서 사람을 나눌 때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었기에 유교라는 학문을 연구하는 사대부와 선비 다음으로 농민을 넣었지만 사대부와 선비가 취하면 안 되는 덕목이었던 돈을 취급하는 상인은 가장 멸시를 받았다. 그럼에도 부에 대한 갈망은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기록의 나라였던 조선의 여러 문헌에서 엿보이는 탐관오리와 뇌물에 관련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관료와 정치인의 부정과 비리, 경제인의 횡령과 배임, 개인의 사기가 수시로 발생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과는 달리 체통을 중요시했던 조선에서 사대부와 선비는 자신들의 부(富)에 대한 갈망을 도포자락에 숨겨두어야 했기에 그나마 표현하며 해소하던 방법이 삼해주를 마셨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이강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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