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을 걷어내자 노둣길이 드러났다
나쁜 기억을 걷어내자 노둣길이 드러났다
  • 이소애 시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24.03.0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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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애 시인 / 문학평론가
이소애 시인 / 문학평론가

안 좋은 기억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아직 겨울 끝자락에서 맴돈다. 노둣(路頭)길은 바닷물이 밀려오면 보이지 않던 길이, 썰물 때는 섬과 섬을 잇는 걸어다니는 징검다리를 말한다.

전남 신안군 암태도와 추포도를 잇던 콘크리트 길을 철거한 뒤에 변화가 왔단다. 300여 년 전 암태도와 추포도를 오가던 노둣길이 드러난 것이다. 낙지, 칠게, 짱뚱어도 다시 찾아와 갯벌생태계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나쁜 기억이 가로막으면 서로의 관계가 멀어진다. ‘멀어진다’라는 단어가 내 생각을 잡아당기며 이리저리 끌고 다닐 때가 가장 위태롭다. 정월대보름에 오곡밥을 먹으며 연날리기, 팽이치기, 투호 던지기, 널뛰기, 쥐불놀이하면서 빙빙 돌리던 깡통의 불꽃처럼 친구를 소중하게 여겼던 옛 생각이 잡념을 불태웠다. 부럼깨기하면서 조심스럽게 더위팔기도 한다.

전주 매곡교에서 달집태우기의 매캐한 연기를 마시면서 한 해의 풍요와 행복을 빌었던 기억을 불러본다. 전주천에서 다리밟기하던 가족과 친구들을 하나하나 손을 꼽아 보는 즐거움도 있다. 시간이 사람과 기억을 끌어당기면 외롭다는 말만 되뇐다. 한 해의 건강과 평원을 기원하면서 9가지 나물에 오곡밥을 먹었다.

정월대보름 달빛은 흐리고 잔비 때문에 마음속으로 둥근달을 초대하면서 윷놀이도 했다. “정월대보름 굿 망월이야.” 행사를 전주 삼천 천변 세냇가 놀이마당에서 진행했다는 데 마음만 달려갈 뿐 몸은 응접실에 있었다. 요즈음 전주천을 굴착기로 파헤치고 있다. 강은 얼마나 아플까. 몸살이 나서 물고기들이 죽어가고 있다. 또 전주천이 옷을 갈아입나 보다. 전주천에서 자연을 읽는 계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나무며 자갈이며 쌓았던 둑을 허물고 또 허문다. 가지가 잘리고 뿌리를 허공에 내놓으며 나무가 죽어가는 모양이 안타깝다. 전주천에서 정월대보름도 즐기고 소살소살 흐르는 전주천의 맑은 물소리와 풀숲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사라질까 염려된다. 점점 전주천 모습을 잃어가는 것이 마치 인간의 생명에 손대는 것 같은 두려움도 있다. 많은 돈을 퍼부어도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없는 북쪽으로 흐르는 강물에 인간은 겸손했으면 좋겠다.

그림이나 음악으로 상처가 난 마음을 치유하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는 황금빛처럼 화려한 빛을 품어낸다. 매혹적이며 듬직해서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보듬어 줄 열정적인 사랑이 보인다. 봄바람이 목덜미를 감고 꽃냄새를 풍기는 3월이면 내가 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조용한 침묵의 피정을 갖는다. 산이나 바다가 아니어도 집에서 촛불과 꽃, 마음에 담을 책만 있으면 안 좋은 기억은 지우개로 지워진다. 내가 행복해야 남에게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가끔 자기 자신을 점검해서 모가 난 성격은 몽돌처럼 다듬어야 함을 느낀다. 가끔 내가 나에게 휴가를 보내기도 하고, 상처받은 사람을 인정해 주는 여유로움이 있어야 겨울 끝자락에서 벗어난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자기에게 함부로 했던 자신을 초대해서 도닥거려 본다. 차창 밖 매화 향기가 내게로 스밀 때까지 떠나보내면 그이와 나와 드나들 수 있는 노둣길이 보일 것이다. 누구나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인정할 때 어울리며 흔들리는 꽃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북두칠성도 계절별로 위치가 다르다. 봄 자정쯤에는 북두칠성이 북극성 위에 있고 가을에는 아래에 있다. 반시계방향으로 빛을 내기 위해 자리를 바꾼다. 북극 하늘에 밝은 별 7개가 국자 모양으로 늘어선 모양을 보면서 행여 북두칠성이 앵돌아지지 않을까 조심조심 하늘에서 찾아보던 어릴 때의 나처럼 관심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시가 나쁜 기억을 훔쳐 가기도 한다. 기형도의 「위험한 가계」에서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다음 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에 밑줄을 그어본다.

안 좋은 기억을 걷어내면 초록빛 노둣길이 기웃기웃할 테니까.

이소애<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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