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성교육
길 위의 인성교육
  • 황호진 전북대학교 특임교수
  • 승인 2024.03.03 14: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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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진 전북대 특임교수/前전북교육청 부교육감<br>
황호진 전북대 특임교수/前전북교육청 부교육감

인류의 문명은 길에서 시작하여 번영하고 길에서 끝이 난다.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비단길을 통해 서로 문명을 꽃피웠지만, 로마의 안토니우스 역병이 비단길을 통하여 로마와 함께 한나라의 쇠망을 가져오기도 했다. 로마의 도로는 군대, 물자 등 이동을 통해 제국 번영에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쓰이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죄를 씻는 의식에서 비롯된 산티아고 순례길이 프랑스에서 ‘쇠이유’(Seuil)로 다시 태어났다. ‘나는 걷는다’의 유명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B.Olivier)가 설립한 쇠이유 프로그램은 소년원의 청소년이 하루 25㎞ 이상 총 2,000㎞를 걸으면 석방을 허가한다.

처음 출발할 때 청소년들은 거부하기도 하지만, 이 고비를 넘기면 동반자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조금씩 깨우쳐 간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여태 들어보지 못한 칭찬을 듣기도 한다. 걷기를 마칠 때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배려와 존중의 가치를 터득한다.

쇠이유 프로그램을 거친 청소년들의 재범률이 85%에서 15%로 크게 낮아졌다. 결손가정, 학업부진 또는 폭력을 경험한 소외 청소년들이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생각과 함께 자기 존엄성을 회복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인근 벨기에와 폴란드, 미국 일본 등에서도 실행되고 있다. 우리나라 산림청에서 ‘백두대간 청소년 탐방단’을 매년 운영하고 있으며, ‘엄홍길의 희망원정대’ 등 민간단체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다. 걷기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며 치유 과정이다. 길이 우리 삶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준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식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 교육의 주된 역할은 지식전달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전문지식을 피상적으로 암기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정신노동에 불과하다.

지금 당장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에 가장 요구되는 능력은 주체적이고 비판적이면서도 협업하고자 하는 인성 역량이다. 이 과정에서 창조적 능력도 개발된다.

길 위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숨결이 서려 있다. 우리의 굴곡진 역사가 배어 있으며, 다채로운 문화가 살아 있다. 포장된 길도 있지만 밭두렁 또는 숲길을 따라 걸을 수도 있다.

우리 전북에는 ‘고종시 마실길’ 등 지역마다 다양한 걷기여행길이 조성되어 있다. 지리산 둘레길과 백두대간 종주길은 전북과 연결된 장대한 걷기여행길이다. 장수 뜬봉샘에서 천리길 금강이 시작되며 진안 데미샘에서 오백삼십리 섬진강이 시작되어 생명의 근원인 강 따라 걷기에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해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삼남대로가 지나기도 한다.

2012년 세계순례대회가 열렸던 ‘아름다운 순례길’은 9개 코스 240km로 전북의 역사와 문화를 포괄하고 있으며, 종교 간 화해를 상징하는 세계 유일의 길이다. 아름다운 순례길의 한 코스는 대략 25km로 하루 걷는 거리로 만만치 않다.

뜨거운 태양이 이마 위로 작열하고 땀이 비 오듯 흐를 때 마냥 멈추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찾아온다. 함께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새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달콤한 노래가 된다. 길 위에서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발견한다.

멀리 가기 어려울 때는 등굣길에 친구들과 선생님과 손잡고 이야기하며 운동장 걷기를 할 수도 있다.

‘인간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존재한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길을 걷는 것이다. 내가 그리로 걸어갈 때 내 머리도 마음도 함께 가기 때문이다.

길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나 자신이다. 청소년 인성교육은 길에서 시작되어 길에서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인성교육은 존재의 근원에 닿아 있는 것만 같다.

황호진 <전북대학교 특임교수/前 전북 부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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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꽃장가 2024-03-05 13:28:24
좋은 글, 아름다운 글입니다. 출근하는 효자동에서 퇴근하는 경원동에서 게으름을 핑계로 자가용 출퇴근을 하지만 전주의 걷고 걷는 길을 매일 생각합니다. 여유있을 때는 걷기를 실천합니다. 이야기가 있는 길. 슬퍼서 울고가던 길. 엄마가 있었고, 친구가 있던 길. 저의 부족한 인성도 그 길에서 자랐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