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184) 봉윤숙 시인의 ‘반지’
[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184) 봉윤숙 시인의 ‘반지’
  • 강민숙 시인
  • 승인 2024.03.0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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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지’
 

- 봉윤숙 시인
 

 장롱의 옷을 꺼내다 떨어진 반지함, 반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소란을 앓던 두통이 머무르는 곳마다 폭설이 내린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묻어오는 눈송이들은 심심풀이 팝콘처럼 빈 곳에서 툭툭 부서지며 숙주처럼 자란다

 골목길을 누비며 집 보러 다닐 때는 상자만한 방에서도 살 수 있던 시절이었다 덮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뚜껑 있는 것들을 사들이곤 했다.

 물체의 지름보다 큰 뚜껑, 지름을 재기 위해 깨금발을 딛고 서거나 구겨진 삽화에 동그라미를 친다

 어떤 기억에는 뚜껑이 달려 있다

 한번 열린 문은 쉽게 닫히지 않는다

 지금은 다른 약속의 빙점을 녹이고 있을 반지, 품을 스르륵 빠져나갔다.
 

 <해설>

 “장롱의 옷을 꺼내다 떨어진 반지함”에서 화려한 기억보다 어두운 삶의 기억이 봉긋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빈 반지함에서 “소란을 앓던 두통이 머무르는 곳마다 폭설이 내린다”고 하니, 반지를 마련할 때의 아름다운 맹세가 온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듯합니다. 추억의 폭설을 넘어 “헤드라이트 불빛에 묻어오는 눈송이들이… 빈 곳에서 툭툭 부서지며 숙주처럼 자란다”는 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보입니다. 

 “상자만한 방에서도 살 수 있던” 가난한 시절에는 마치 살림살이에 굶주린 사람처럼 “덮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뚜껑 있는 것들을 사들이곤” 했습니다. 반지 대신 채워진 것들이겠지요. 

 그렇지만 알맹이 같은 반지의 아픈 추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다른 약속의 빙점을 녹이고 있을 반지”라면 회한(悔恨)이 스며 있겠네요. 그 반지의 상념이 “품을 스르륵 빠져나갔다”라고는 했지만, 아직도 사라진 반지의 추억이 가슴 한복판에 남은 듯합니다. 

 

강민숙 시인

 강민숙 <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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