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 망각속에 살고 싶다
[독자수필] 망각속에 살고 싶다
  • 서상옥 시인
  • 승인 2024.02.2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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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옥 시인<br>
서상옥 시인

19세기 낭만파시인 바이런(G.G.Byron)은 “지나간 기쁨은 지금의 고뇌를 깊게 하고 슬픔은 기쁨과 뒤엉킨다. 후회도 그리움도 다 같이 보람이 없다면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망각忘却뿐이다”라고 의미 있는 삶의 회포를 풀었다.

“시간은 위대한 의사”라고 한 어느 명사의 말이 떠오른다. 지나온 삶 속에 겪어 온 희로애락을 다 기억하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어린 손자를 바라보면서 예쁜 재롱에 사랑을 느끼고 정을 쏟는다. 철없이 뛰놀던 기억을 그리워 하지만 어느 세월인가 다 잊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상에 불타던 젊음과 정열에 넘치던 사랑도, 불굴의 의지를 다짐하던 꿈들이 어느덧 쇠잔해 가는 것을 감출 수가 없다. 때로는 아름다운 날도 꽃이 피었고 슬픈 날의 눈물이 가슴을 저리게 한 때도 겹쳐온다. 산 넘어 찬란하게 빛나던 무지개를 잡으려던 나폴레옹의 소망도 푸른 하늘의 별을 헤아리던 티 하나 없는 가슴도 불타오던 사랑도 한낱 꿈이었나 싶다.

황토밭 돌담 골목에서 맑은 동심에 희망의 꽃씨를 뿌리고 자라 널따란 자연의 아름다움과 우주의 섭리를 깨달아 왔다. 배움의 꽃동산에서 학문을 익히고 진리를 배웠다. 인생의 질곡 속에 삶의 맛을 느끼고 힘찬 생의 맥박 소리를 들으며 번뇌의 수렁에 빠져 방황하기도 했다. 청춘의 피가 고동치던 학창시절에 정의를 외치던 함성이 지금도 귓전에 맴돌고 있다. 오금을 쥐어짜던 사회악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시퍼런 마음의 칼날이 요동치던 시절도 잊을 수가 없다. 부질없는 세월의 넋두리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웠던 삶이었다고 느껴진다.

올곧게 살자고 다짐하면서 학문을 익히고 지성과 이성을 가름해 오지만 모두가 명심보감에 숨어 있는 것만 같다. 애국애족을 부르짖는 정치가나 경제를 살리겠다는 기업가, 홍익인간의 교육이념 아래 윤리 도덕을 가르쳐오는 교육자나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모두가 천심을 버리고 사는 것 같아 한심스럽다. 존속살해범이나 성폭력이 난무하고 부정식품이 어린이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등 소위 오적五賊이라는 괴물 같은 소리도 역겹다. 세계가 전운에 싸여 어지럽다. 참! 살기가 어려워지는 것만 같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살지마는 정신적인 빈곤 속에 핵무기보다 무서운 오뇌를 느낀다.

문명의 뒤안길에서 사는 아프리카 후진국 사람들은 불행이 무엇인지 모르고 산다고 한다. 문명의 이질에서 오는 괴리를 통감한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는 흙에 묻혀 살면서 고통과 불행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신神은 왜 인간에게 천국과 지옥을 알게 해 주었는지 모르겠다. 연옥의 세계에서 단테를 인도하는 베아뜨리체의 고뇌와 이방인의 뫼루소가 범죄의 창살에 억매이지 않았을 것이다. 시온성이 하늘의 축복을 받는 영원한 평화의 성지가 되지 못하는 성싶어 번뇌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사철의 노래가 고운 화음으로 울려 퍼지듯 온 누리가 평화의 종소리로 하모니를 이루었으면 좋겠다. 우주개발을 위한 수천수만 개의 위성보다 그 많은 노력과 투자가 제로화 되는 날 잃어버린 낙원이 회복될 것이다. 모든 것을 공간으로 비워 두는 망각忘却의 세계가 아쉽다. 고요한 새벽에 나 자신을 타인처럼 응시하면서 망각 속의 망각을 그리워하며 묵상에 잠긴다.

 

서상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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