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학교 상상하기(31) - ‘괴물 부모’와 ‘좋은 부모’
작은학교 상상하기(31) - ‘괴물 부모’와 ‘좋은 부모’
  • 윤일호 장승초 교사 
  • 승인 2024.02.2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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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바퀴 교육

 자전거1 / 강정규
 

 뒷바퀴가

 끈질지게

 쫓아온다.

 (『목욕탕에서 선생님을 만났다』,문학동네,2013)
 

 지난 1월 마지막 토요일, 겨울방학인데도 장승초 다목적실에 80여 명의 어른들이 북적거렸다. 올해 입학하는 1학년 학부모부터 올 2월에 졸업한 학부모 그리고 장승초에 근무하는 교원까지 모두 모였다.

 학부모·교사 공동연수를 위해서다. 강의를 위해 오신 강사님조차 요즘 같은 때에 이런 연수 진행에 놀라워하신다. 연수는 2012년부터 해마다 1월이면 열렸으니 벌써 13년째인데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학교’라는 학교 철학에 따라 학생 교육에만 멈추지 않고, 학부모와 교사도 함께 성장하자는 취지였다.

 굴러가는 자전거 바퀴처럼 앞바퀴가 잘 굴러가면 뒷바퀴는 따로 특별한 교육하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하지만 자칫 앞바퀴가 잘 구르지 않으면 금세 자전거는 넘어지고 만다. 사실 자녀와 학교 교육의 또렷한 벼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앞바퀴처럼 잘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이 본보기가 되어 바로 서는 아이가 되지 않을까.

 

 ■ 괴물 부모의 탄생

 “민주주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말은 프랑스 교육 철학자인 필리프 메리외가 한 말이다. 김현수 교수의 ‘괴물 부모의 탄생’이라는 책 서문에서 읽은 글인데 요즘 같은 때 여러 번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자신이 바라는 요구는 넘쳐나지만 정작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만큼의 자유나 성숙한 시민으로서 자세는 그리 없어 보인다.

 학교에서 그런 현상이 더욱 눈에 띈다. 지난해 서이초 사태에서 겪은 것처럼 부모 욕망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자녀에게 투영하고, 공동체가 자신의 기대나 바람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해치고 파괴한다. 공동체를 배려하거나 함께 하려는 시선은 전혀 없다. 마치 부모가 ‘갑’이고, 학교는 ‘을’인 것처럼 행세한다. 고소나 고발을 남발하고, 민원은 부지기수다. 학교가 민원의 탈출구가 되었으니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답답할 때가 많다. 오죽하면 ‘괴물 부모’라는 말이 등장했을까?

 

 ■ 좋은 부모 되기

 학교에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사건들은 대부분 가정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런 갑질 부모는 가정에서 독박육아에 시달렸거나 자녀를 사유화하여 자신의 삶을 자녀에게 그대로 투영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부모의 특징에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사회도 큰 몫을 한다. 누군가 내 자녀를 살피거나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거의 사라진 사회다 보니 내 자녀는 오로지 내가 챙겨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하고, 결국 왜곡된 부모관으로 나타나게 된다.

 시골 학교는 갑질 부모가 없는 편이지만 자녀를 키우는 올바른 관점을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맞벌이 부부로 늦은 저녁까지 일하며 자녀를 돌봄 시설에 맡기는 것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부모가 집에 있는 데도 저녁 늦은 시간까지 돌봄을 요구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부모의 앞바퀴 역할은 잊은 채 지나치게 학교나 사회에 자녀 돌봄을 의존하려고 한다.

 가끔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청소년을 보다가 ‘애가 참 괜찮아, 참 잘 자랐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앞바퀴 부모 삶을 보며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으로 그 삶을 고스란히 배웠겠지. 따지고 보면 특별한 부모 교육이 있는 건 아니다. 자칫 잊기 쉬운데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과 정성, 관심과 노력으로 자랐을 테니까. 거기다가 학교 공동체에서 바른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교육이 있을까.

 

 윤일호 장승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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