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158> 차의 길 61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 <158> 차의 길 61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 승인 2024.02.1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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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계집 건, 곤.

한 사발 용단차(龍團茶)를 마시고

꿈속에선 아직 대궐을 생각하네.

지방관으로 헛되이 몇 개월을 보냈으니

한그루 당채꽃을 보지 못했네.

 

위의 시는 매계 조위(梅溪 曺偉 1454~1503)가 충청감사로 있던 시절(1494) 홍주를 주제로 지은 「홍주 제영(洪州題詠)」이라는 시이다. 용단차 한 사발을 마시는 것으로 보아 당시 최고의 차를 마신듯하다. 용단차는 용의 무늬를 찍어낸 단차이다. 중국의 용봉차가 소개된 것은 문종 32년(1078)에 송 황제가 고려 왕실에 용봉차를 보내면서이다. 용봉차는 용봉단차라 부른다. 용단은 주로 황제용 차로 만들어졌으며, 봉단은 왕자, 공주 등 귀족용 차이다. 당시 용봉차는 최고품의 차였으며 명차의 대명사였다. 당채꽃은 주로 지방관의 선정을 표현할 때 쓰인다. 명차를 마시며 대궐을 생각하지만 당채꽃을 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지방관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매계는 조선조 성종대 신진사류를 대표하는 관료문인 중 한 사람이다. 성종의 지우(知遇)를 입고 ‘두시언해’를 비롯한 여러 문집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된 후 귀양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매계는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되고, 이어 순천으로 이배되어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5년여의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매부인 김종직과 당숙인 조석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문예에 출중하여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1484년(성종15) 6월 홍문관으로 있던 매계는 아버지를 위해 외방으로 가기를 자청한다. 이에 성종은 효와 관련된 것으로 말리지 않았다. 『성종실록』 권167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승정원에서는 “조위의 아비는 나이가 70이 넘었고 묵은 병이 있어, 조위는 외아들이라 돌아가 봉양할 뜻이 절박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고향 가까운 곳의 수령으로 차출하라고 하여 함양군수에 제수하였다. 그 어버이에게는 쌀 콩 소금 미역 청주 등을 보내고 조위에게는 칭찬하는 글을 내려 아끼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후 함양군수로 있던 조위는 1489년 (성종 20) 아버지 조계문의 상을 당했고, 3년 상을 마친 후 중앙 관계에 복귀한다.

함양군수(1484년 8월 부임) 시절 지은 「관아에서 우연히 쓰다 (郡齋偶書)」라는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쓸쓸한 바람에 날씨가 차네.

황당(黃堂)에선 화필(花筆)을 버려두고

오궤(烏)에선 용단차(龍團茶)를 마시네.

버들가지 싹에는 아직 봄기운이 옅고

매화나무 가지 끝에는 눈이 마르지 않았네.

내일 아침 관아에선 술이 잘 익어서

손님들 찾아와서 실컷 즐기리.

 

매화나무 끝에 눈이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봄이 오는 길목인듯하다. 차갑고 쓸쓸한 날씨에 화필을 버려둔 자신을 비유한 글인 듯, 화필은 주로 생화필(生花筆)이며 중국 오대 왕인유(王仁裕)가 『개원천보유사』에서 “이태백이 어릴 적 쓰던 붓끝에서 꽃이 피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그 뒤에 천재성을 발휘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라고 한 기록을 원용한 것으로 문장이 나날이 발전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화필을 버려두고 궤안에 기대어 용단차를 마시며 봄맞이를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마신 용단차는 10년 후 그의 시 「홍주 제영」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곁에는 시와 차가 늘 함께했던 것 같다.

 
글=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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