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선생님의 우리말 사랑
백기완 선생님의 우리말 사랑
  • 최영록 생활글 작가
  • 승인 2024.02.1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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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록 생활글 작가

 백기완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꼬박 3년이 흐른 아침이다. 선생님이 떠오를 때마다 왠지 가슴이 먹먹하다. 평생 그토록 바라며 싸웠던 통일과 진정한 민주화 그리고 노나메기(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이 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갈수록 태산인 세상이기에 걱정이 더해진다. 선생님을 언제 처음 뵈었을까? 1999년말이었던 듯. 인터넷신문 초창기, 뉴스부장 직책으로 동영상 사진기자와 함께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았다.

 “최부장, 무엇을 물을지 모르지만, 한 컷이라도 편집한다면 응하지 않겠네” 영락없이 인자한 할아버지 표정이었으나, 형형한 눈빛에 말씀은 추상같았다.

 선생님이 하신 주옥같은 말씀들을 20여분 동안 편집 하나 없이 내보낸 덕분에 여러 번 뵐 수 있었다. 그 다음해인가, 평양에서 반세기 만에 누님과 만나 울었던 눈물이 얼룩져 마른 손수건을 보여주셨고. 특유의 유행가 한 자락도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었다.

처음으로 점심으로 연포탕을 대접하면서 “야채하고 싸드세요”라고 했다가 혼쭐이 났다. “야채는 일본말이니 채소라고 해. 남새나 푸성귀라고 순우리말로 하면 더 좋지” “주의하겠습니다” “주의도 조심이라고 하면 좋겠어” “감사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라 하니 “감사합니다 보다 고맙습니다라고 하면 좀 좋아” 아하-, 선생님의 끝도갓도 없는 우리말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심히 부끄러웠다.

 그렇게 선생님의 우리말 사랑을 알게 되었다. 수백 아니 수천 개는 될 듯, ‘부심이’나 ‘버섯발 이야기’ 책에는 한자어가 아예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들은 순우리말도 많겠으나, 어쩌면 선생님이 실제로 만든 말도 많은 듯했다. 그런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한없이 정겹고 구수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는 말들이 많았다. 지금 당장 너도나도 살려쓰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선생님이 30-40여년 전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여 사전에 실리는 등 정착된 우리말이 어디 한두 개이던가. 동아리, 새내기, 달동네, 새뚝이 등을 떠올려 보시라. 멋지다. 갈고 닦아야 할 우리말도 부지기수이지만, 선생님은 순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우리말 창조자’로 나섰다.

 선생님은 질색팔색일 단어이지만 요즘말로 크리에이터이다. 고향→옛살라비, 우정→벗나래, 세월→달구름, 일생→한살매, 내일→하제, 반찬→건건이, 별명→덧이름, 화두→말뜸, 대담→댓거리, 배신자→등빼기, 행복→넉넉살, 구조→틀거리, 목화→흰솜풀, 문장→글월, 욕망→뚱속, 지구→땅별, 식구→입네, 원수(적)→부셔, 폭력→막심 민중→니나, 든메→사상, 새름→정서, 역사→갈마, 심장병→가슴탈, 잠깐→얼짬, 인류→온이, 결코→마땅쇠, 책→글묵, 파도→몰개, 귀신→깨비, 혹시→얼추….

 남산터널을 뚫는데, 터널이라는 영어 대신 판굴이나 맞뚫레로 하자고 건의했는데 당국에서 채택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우리말을 쓰자는데 어원이 없으면 어떠랴. 어느 국어학자도 흉내낼 수 없는 선생님만이 지어낸 낱말들이 또 얼마나 많았는가. 외국어처럼 낯선 말도 많으나, 언어공해가 심하다 못해 ‘영어공화국’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생각하면, 선생님의 조어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지 않은가.

 선생님의 우리말 사랑은 바로 조국사랑이자 한반도 통일사랑에 다름아니었을 터. 운동경기를 응원할 때 쓰는 구호 ‘화이팅’은 영어권에서도 쓰지 않는다는데, 우리는 남발하고 있다. 화이팅을 ‘아자아자’라고 하자는데 기가 질렸다. 흔히 ‘웰빙’이라 하지만 ‘참살이’로 순화해서 쓰면 좀 좋겠는가.

 언중들이 살려쓰고 싶은 좋은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할 때, 우리말과 글의 주체화, 민주화가 앞당겨지지 않을까. 선생님이 일상생활에서 모범을 보인 우리말들이 호수에 퍼지는 물무늬처럼 퍼져 널리널리 쓰였으면 좋겠다.

 
최영록 <생활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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