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분단시절 베를린 방문과 독일 유학
독일 분단시절 베를린 방문과 독일 유학
  • 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
  • 승인 2024.02.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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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br>
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

필자는 빈 대학 시절 약혼녀와 함께 보훔에서 열린 ‘세계 가톨릭학생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말이 대표이지 나라에서 우리를 파견한 것이 아니었고 유럽 유학생 중에서 우리 둘을 빼고는 대회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대표가 된 것이다.

세례를 받은 초기에는 신자들이 자신들만이 은혜를 받은 양 정열을 쏟고 설치기 일쑤이지만, 필자는 오래전에 세례를 받았는데도 당시 주오스트리아 ‘한인회장’,‘OSCO(Overseas Student Coordination, 주 유럽외국인유학생회) 오스트리아 회장 겸 유럽유학생회 중앙이사’를 맡고 있는데다가 공부 못지않게 가톨릭의 일에 열중했기 때문에 각별한 추천으로 감히 그 먼 곳까지 기꺼이 갔던 것이다.

고위 성직자들의 열정적인 설교를 듣고 각종 모임에 대표로 참석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등 너무 바쁘고 힘이 들어 속된 말로 죽을 고생을 했다. 서양에서 맞는 황금 같은 여름방학에 필자처럼 항시 미련하고 순진하게 사는 사람이나 홀로 와서 힘겨운 대표 역을 맡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에센(Essen) 대주교께서 집전한 대미사를 끝으로 모든 행사를 마친 뒤 참석자 전원이 촛불을 켜들고 빙빙 돌며 작별의 노래를 울먹이며 부르는 동안 참석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종교적 엑스타시의 극치’를 맛볼 수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행사 주최 측에서는 참석자들(본국에서 파견된 사람들과 유럽 유학생들)에게 그간의 노고에 대한 위로와 작별의 선물로 베를린(Berlin)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 공산국가로 둘러싸인 분단된 서(西)베를린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 몇 마디 쓰면, 먼저 베를린 자유 대학교을 보았고 공습으로 거의 파괴되었고 시커멓게 타버린 그래서 유명세를 타게 된 인상적인 교회를 보았으며,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거무스레한 강을 보았고, 강을 건너 자유의 세계로 오다가 총살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특이한 경험은 전철의 한 구간이 동베를린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때 분단국(한국인, 타이완인)에서 온 사람들은 잡혀갈 수 있고, 비록 한 구간이지만 공산국가에 입국한 셈이라 여권에 동독 입국의 날인이 찍히면 사상을 의심 받아 본국으로 소환된다고 해서 동베를린으로 들어가는 역을 손가락으로 세면서 벌벌 떨었던 일이다.

두번째 독일의 방문은 뮌헨 체재 시 본에서 베를린대학교의 냉전의 세계 최고 석학 놀테(E. Nolte) 교수를 만났고 그 후 놀테 교수와의 관계는 지속되었으며, 마침내 놀테 교수의 지원으로 독일의 대표적 장학 재단(최초의 독일 공화국 대통령 에베르트가 만들었음)의 하나인 ‘에베르트 학술재단(Ebert Foundation)’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게 되었다. 역시 대장학재단에서 주는 연구비인 만큼 액수도 상당했지만, 무엇보다도 재단에서 주는 ‘무료 특급열차 승차권’으로 부담없이 대도시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이규하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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